대포, 범선, 제국, 카를로 치폴라 지음, 최파일 옮김, 미지북스, 2010

- 1400-1700년, 유럽은 어떻게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게 되었는가?

 

이 책은 묻는다, “14세기 말 이후 유럽 인은 어떻게 (…) 모든 주요 해로를 장악하고 해외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는가? 무엇이 유럽 인으로 하여금 불안한 수비적 위치에서 대담하고 공격적인 팽창 국면으로의 극적이고 갑작스러운 전환을 가능케 했는가?” 서문의 첫머리를 다음의 말로 시작하면서. “나는 전쟁과 혁명이 인간사를 처리하는 한 가지 방식이라는 점을 인정하지만 결코 합리적이지도 정중하지도 않은 방식이라고 믿는 편이므로 확고한 평화주의자다. 또 나는 배에 오르기가 무섭게 몇 분 만에 토하다 죽을 것만 같으므로 뱃사람으로서 형편없다. “대포와 범선”이라는 제목의 책을 쓴 것에 누구보다 먼저 깜짝 놀랄 사람은 다름 아닌 저자다. 그리고 독자들은 이 책이 무기에 대해 프로이트적 애착에 사로잡혀 있지도 바다에 대한 원초적 사랑 때문에 한쪽으로 치우쳐 있지도 않을 테니 안심해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은 그저 저자가 근대 초기 역사를 연구하다가 압도적 증거 앞에서 취향과 성향에 반하여 대포와 범선의 중요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쓰였다.”(4쪽) 하하. 

초창기 유럽의 대포는 ‘사석포’라는 이름의, 돌덩이를 뱉는 거대한 금속 무기였다. 철보다는 청동이 많이 쓰였다. 당시 철은 ‘효과적으로 주조하기 어려운 금속’이었기 때문이다. 청동은 제작이 비교적 쉬울뿐더러 예부터 종에 대한 교회의 수요가 커 숙련공들이 유럽 전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 역사에서 역설을 발견하는 일은 언제나 흥미롭다. “종과 같이 고상한 물건을 만들면서 발전한 기술이 결과적으로 살상 무기의 진보를 낳았다는 사실은 역사의 무수한 아이러니 중 하나다.”

18세기 이전까지 우리가 오늘날 쉽게 상상하는 모양의 대포는 발명되지 않았다. 대부분 지나치게 크고, 무겁고, 쉽게 갈라졌다. 하지만 15~18세기 내내 유럽 각 나라는 군사력의 증강을 절실히 원했고, 따라서 새로운 무기도 간절히 원했으므로, 더 가볍고 튼튼한 대포를 만들려는 힘이 기술 발전을 이끌었다.

책은 유럽 각 국의 대포 제조 기술의 발전 과정을 상세히 추적한다. 에스파냐의 경우 이 시기 내내 자국에서 제대로 된 대포를 만들지 못했다. 당시 왕정 관료들은, 넘쳐나는 금은 으로 수입한 대포가 국내품보다 더 적은 비용이 들어간다고 주장하기도 했다(아래에서 소개할 17세기 프랑스 수상 콜베르의 견해와 비교하면 매우 흥미롭다). 영국은 특이하다. 영국은 유럽 전역에서 홀대받던 ‘주철 대포’의 품질을 독자적으로 향상시켰다. 주철 대포는 청동에 비해 비용이 ‘적게’ 들었다. “영국인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자신들이 만들어낸 제품이 제 기능을 다하면서 비용은 적게 드는 것뿐이었다.” “경제적 이점이 너무도 명백했기 때문에 각국 정부는 영국산 새 무기를 무시할 수 없었고 영국 대포 산업의 수출 활로는 즉시 뚫렸다.” 어째서 영국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주철 대포를 생산하는 데 갑자기 성공할 수 있었는지 구체적인 요인이 분명치는 않다. 몇 가지 새로운 제작 기술의 발명, 영국산 철 원료에 상대적으로 많이 포함된 인을 활용하는 지식을 확보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프랑스는 18세기까지 대포 생산에서 자립을 달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프랑스 수상 콜베르는 국내 경제에 대한 혜안이 있었던 것 같다. “비록 프랑스산이 외국산보다 더 비싸고 품질이 더 좋지 않더라도 외국산보다 프랑스산을 구입하는 것이 좋다. 이중의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유동 자산이 유출되어 국고가 고갈되는 위험을 피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 백성들이 생계를 유지하고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다.” 읽으면서 깜짝 놀랐다.

유럽의 기술 발전과 생산력 증대는 스웨덴의 야포 “레예멘츠스튀케”로 비유럽 세계와의 격차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벌려놓게 된다. 이로써 “비유럽권의 사람들은 유럽의 팽창에 적절히 대응하기가 극도로 어려웠을 뿐 아니라, 영토 방어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하게 된다. 특히 대포 제작에서 유럽의 진보는 전함의 건조와 해전에서도 마찬가지로 새로운 전략과 기술의 주목할 만한 발전을 동반”했다.


범선의 진화 과정에 대해서는 간단히 다음 발췌문으로 대신하고 싶다. “노잡이들을 돛으로, 병사들을 대포로 대체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인력을 기계적 동력으로 대체하는 것을 뜻했다. 대서양 지역 민족들은 대포를 실은 범선으로 완전히 선회하면서 인력 확보에서 필연적으로 따르는 병목 현상을 피하고 훨씬 더 큰 양의 자연적 에너지를 자신들의 뜻대로 동력화할 수 있었다. 유럽의 범선들이 가장 먼 바다까지 위협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바로 그때였다.” 한마디로 “인력의 시대가 끝나고 기계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오히려 비유럽권의 대포와 범선이다. 투르크와 중국을 분석하는 부분은 아주 흥미롭다. 투르크 인과 중국 인들 모두 대포 제작 기술을 습득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자원과 능력을 충분히 갖추었다(15세기까지는 우월하다고 말할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동일한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유럽과 같은 대포를 독자적으로, 혹은 유럽의 기술을 재빨리 수용하여 발전시킬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뿌리 깊은 전통과 사회 구조” 때문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투르크 군대의 강점은 기병이었는데, 지배 계급은 “기마술로부터 품위 있는 자부심과 우월감”을 확보했다. 대포는 왕국에서 가장 경멸받는 계층인 노예들에게 떠넘겨졌을 뿐이다.

청과 조선에서는 ‘중체서용’, ‘동도서기론’ 등의 정책적 전망이 제시되었다. 하지만 “기술은 과학에 뿌리를 두고 과학은 철학에 뿌리를 둔다. 자신들의 철학을 수정하지 않는다면 중국인들은 결코 서양의 과학을 배울 수 없었다.”는 저자의 인용문으로 그들의 실패를 설명할 수 있다. 기술은 단지 기술로만 그치지 않는다.

이 책의 주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언뜻 보기에 요점은 단순히 새로운 제작 방식을 소개하고 그에 맞는 도구와 수단, 기계를 도입하는 문제인 듯하다. 그러나 여기에 진정으로 수반되는 것은 사회적 신념 체계와 관습의 광범위한 변화다….” 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인용문으로 끝맺는다. 감동적이다. “(…) 잠시 우리는 그것들이 어떤 이름을 달고 우리에게 왔는지를 잊을 수 있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제 영혼보다 제 몸을 지키는 데 급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는 참으로 묘한 방식으로 움직이는 듯하다. 포탄을 공부함으로써 우리는 기계적 발명에 다다르게 되고 발명은 다시 정치 개혁으로 이어진다. 정치 개혁으로부터 우리는 정치 이론들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정치 이론들은 다시 우리를 서양의 철학으로 이끌었다. 다른 한편으로, 기계적 방법들을 통해 우리는 과학을 이해하게 되고 그로부터 과학적 방법론과 과학적 사고를 이해하게 되었다. 한걸음씩 우리는 포탄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졌지만 동시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M. 샹) 이런 과정에서 “기술이 목표가 되고 철학과 사회적, 인간적 관계들은 단순한 수단으로 전락하는 한편, 인간에게 봉사해야 할 기계는 그의 주인이 된다.”

 

사료에 기반한 수치와 참고 문헌이 각주 곳곳에 난무한다. 요즘 주석은 점차 책 맨 뒤의 미주로, 그러니까 ‘읽히지 않는 곳’으로 밀려나고 있는데, 본문-주석-본문-…을 오가는 독서가 그만큼 드물고 어려운 것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뜻이다.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편이다. 저자 카를로 치폴라는 유럽과 이탈리아에서 대가로 불린 경제사학자였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대가’의 필력이 어떤 건지 실감했다. 숱한 각주와 본문을 오가는 동안 전혀 방해받지 않고 몰입했다.

얇고, 부담스럽지 않다. 다음 책도 무지 기대된다. 현재 국내 번역서로는 <대포, 범선, 제국>과 한 종의 산문집만 나와 있다. 

 


대포 범선 제국

저자
카를로 마리아 치폴라 지음
출판사
미지북스 | 2010-09-27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유럽은 어떻게 세계의 바다를 지배했는가?'대항해시대'를 대포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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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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