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의 무게 속에서 어떻게 근대화를 이루어낼 것인가의 문제였다. 4쪽


친구가 추천해준 책이다. 멋진 책이다. 근사한 책이다. 2000년대 초의 5년여 동안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네팔, 티베트를 여행한 인도인 저널리스트의 책이다. 아주 의미심장한 책인데, 솔직히 말해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두어 번 반복해 읽기까지 했고, 각 장마다 내용을 요약해 적어놓기도 했다. 이 책을 통해 인도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네팔의 지독하게 엉망인 근현대사를 어렴풋이나마 처음 알게 되었고, 인디라 간디와 산자이 간디의 통치 시기가 바로 <적절한 균형>의 그때임을 알았으며, 인도야말로 파시즘의 징후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나라라는 것, 거기다 이 '카슈미르'라는 땅이 어느 정도로 복잡한 역사와 종교적 문제가 얽혀 있는지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읽으면서 인도를 비롯한 남아시아의 근현대사를 서술한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작 아직 찾아보지는 못했다. 피상적이지도 않고, 섣부르지도 않다.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못한 채 그저 보여줄 뿐이지만, 남아시아의 이 파국상의 근본에는 저 인용문의 문제, "전통의 무게 속에서 근대화를 이루어낼 것인가"의 문제가 있다. 정상 국가의 필요성. 소말리아가 그렇듯이. 국가의 부재, 취약한 행정 기구는 인민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 여행기이면서 사회학적 산문이기도 하고, 논픽션. 


품위 있는 삶,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는 방법. 십중팔구 공무원이 된 덕분에 중하층의 비루한 삶에서 탈출한 이 사람들에겐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방갈로, 사이렌을 울릴 수 있는 흰색 자동차, 빨간 허리띠를 두른 수행원과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쫑긋 세우는 하급 관리들이 상징하는 그 품위, 주지사 집무실 밖의 과부와 장관이 된 범법자, 지방 경찰서의 부패 경찰관처럼 이 나라에 만연한 빈곤이나 타락과 거리를 유지하는 데서 나오는 품위. 47쪽


세월이 흐르면서 카슈미르 소식은 펀자브나 북동부의 소식들과 나란히 배치됐고, 어디나 살인과 파괴로 어지러운 나쁜 소식들뿐이었다. 그러나 거의 모든 국민이 근근이 살아가는 크고 가난한 나라에서 먼 고장의 악전고투는 개인들의 삶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카슈미르에 대해 필요한 정보를 늘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소규모 출판사에서 펴낸 좋은 책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런 책들은 열심히 찾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았다. 언론에만 의존할 경우 파키스탄이 카슈미르에서 분쟁을 일으켰고, 인도군이 대응에 나섰다는 것 이외의 얘기를 들을 수 없었다. 법질서가 유린되기는 했으나 사실상 큰 문제는 아니며 군대와 민병대에서 곧 필요한 조처를 취할 거라는 식으로 상황을 이해하게 됐다. 숭숭한 빈틈을 메울 실체적인 사실들은 상상에 의존해야 했고, 그것은 내가 생각했던 수준보다 훨씬 더 암담한 것으로 드러냈다. 228~229쪽


이 얘기를 할 때만큼은 노란색 눈동자에서 묵직한 기운이 잠시 가셨다. 그런 사람에게 고작 얘깃거리에 불과하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책을 쓰려면 그것 말고도 다른 게 필요하다고,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벌써 오래전 그 아침에 다카에서 일어난 일에는 이제 관심이 없다고 말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294쪽


사실은 지금도 그렇게 신념이 강한 진보주의자들 앞에서는 자신이 없다. 298쪽




거꾸로 가는 나라들

저자
판카즈 미시라 지음
출판사
난장이 | 2009-03-02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나눔과 배제, 그리고 폭력의 근원을 성찰하는 날카로운 시선. 삶...
가격비교


Posted by 권고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