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려한 용모의 이성(때로는 동성) 앞에서 사람들은 흔히 제 입술을 감빤다. 19쪽


고종석 씨가 쓴 산문집이다. 부제는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사랑에 관한 단어들을 두고 길지 않은 글들을 풀어 놓았다. 표제어들을 쭉 적어 보았다가 다시 지웠다. 쉼표로 이어놓고 보니 보잘것없어 보인다. 


편집자가 되고 싶다는 또래를 만난 적 있다. 나는 어줍잖게 이런저런 말을 주워 담았다. 그와 나는 닮은 점이 많아 보였다. 사회과학 이론을 적당히 공부했지만 딱히 누구 한 사람 진득하게 아는 것은 없고, 이 책 저 책을 두루(다르게 말하면 닥치는 대로) 읽어 왔다는 것. 그는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고종석이라는 사람을 꼽았다. 한국어로 된 가장 아름다운 글을 쓰는 것 같다는 말과 함께. 고종석 씨의 책은 거진 다 읽어 보았다고 했다. 직업을 갖게 되면 그의 책을 만들어 보고 싶다고도 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뇌리에서 잊히지 않는다. 기회가 닿을 때 구해 읽게 된다. 와우북페스티벌 마음산책 부스에서 마침 이 책을 발견했고, 그래서 샀다. 


힘 주지 않고 자신의 기억과 지식을 풀어 놓는다. 같은 뜻의 외국 단어들과 비교하기도 하고, 한국어로서 어원을 따지기도 하고, 같은 계통의 여러 한국어와 견주고, 관계된 개인적인 기억을 늘어놓기도 한다. 그의 문장은 길지 않다. 짧고, 명료하고, 자주 우아하고, 가끔 실없다. 명료하면서 우아하기까지 한 문장은 보기 드물다. 우아하다는 말은 쉽게 쓰여서는 안 된다. 수습할 수 없이 제멋대로 감상에 빠지지 않는다. 아쉬운 점은 뒷부분으로 갈수록 글의 소재로 국어사전을 드는 경우가 잦아진다. 글의 짜임과 글에 대한 저자의 애착, 집착 같은 것이 덜한 것을 느꼈다. 후반부의 글 중에서 '어루만지다'는 그래서 더 도드라져 보인다. 


앞표지 카피로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말은 사랑의 무기, 말을 얻어야 사랑을 얻는다.' 뒤표지 카피는 이렇다. '사랑은 가장 원초적인 감정, 고유어는 그 원초적 감정들의 우물 / 서로 수줍게 사랑하고 사납게 질투하며 격렬히 춤추는, 모국어 낱말들' 앞표지 카피는 넣지 않는 게 더 좋았을 것 같다. 뒤표지 카피는 참 적절하고 이쁜데. 


최근 작가의 트위터를 보면 재밌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괜히 안타까워 보이기도 한다. 정치 이야기를 어찌나 많이 하시는지. 이 책을 읽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고종석을 좋아한 이유를 알았다. 한국에 그 같은 작가가 워낙 드문 것 같다. 그처럼 아름다운 문장을 쓰면서도 글이 허술하지 않고 깊으면서 풍성한 이를 꼽자면 내 깜냥으로는 김우창, 황현산 씨 같은 분들? 몇달 전 한 신문의 칼럼에서 절필을 선언하기도 했는데, 그런 선언일랑 지킬 생각 마시고, 트위터와 술도 좀 줄이시고, 다시 글을 쓰면 좋겠다. 칼럼이든 책이든. 나는 앞으로 그의 책을 하나씩 찾아 읽을 생각이다. 다 읽을 생각까지는 없고, 가급적 언어 및 한국어와 관계된 책만 골라서. 현실정치 비평은 딱 질색이야. 



손톱을 보고 있으면, 우리가 지구생물계의 일원임을, 더 나아가 무생물 자연계와도 깊이 이어져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우리 몸이 바닷가의 조가비나 조약돌과 본질에서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 손톱과 발톱은, 머리카락과 함께, 자라는 것을 쉬이 깨달을 수 있는, 매우 드문 신체부위다. 그러니까 손톱은 가장 광물적이면서도 가장 식물적이다. 61~62쪽


가냘픈 것은 곧 스러질 것 같고 바스라질 것 같다. 그것은 온실의 화초나 선반 가장자리의 유리잔 같은 것이고, 그래서 보는 이에게 보호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연약하고 부드러운 것 앞에서 사람은 조심스러워진다. 여기서 조심스러워진다는 것은 경계심을 갖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섬세해진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그때의 조심이란 무딤의 반의어다. 저 스스로가 섬세함이기도 한 가냘픔은 제 둘레를 섬세하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섬세한 마음의 공간을, 사랑의 공간을 장만한다. 49쪽


길거리의 빈 나무통에서 살며 자족자제를 실천했다는 거지 철학자 '개 같은 디오게네스'의 일화 하나가 문득 가슴에 얹힌다. 하얀 대낮, 광장에서 자위를 하며 육욕을 달래던 그는 이를 비난하는 구경꾼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이리 한탄했단다. "아, 배고픔도 이처럼 문질러서 가라앉힐 수 있다면!" 78쪽


크리스토프 라무르가 <걷기의 철학>에서 내린 정의에 따르면, 산책은 우연에 내맡긴 걷기다. 산책자는 오로지 즐거움을 위해 정처 없이 걷는다. 서두르지 않고, 한가로이, 다가오는 느낌들에 자신을 내맡긴 채, 산책자는 순간의 광경들을 음미한다. 산책자에게는 약속이 없다. 그는 누구에게도 얽매여 있지 않다. 135쪽


어루만짐이라는 형태의 스킨십은 사랑의 처음이자 끝이다. 사람의 살은 다른 사람의 살과 닿을 때 생기를 얻는다. ... 그들은 대개 섹스를 포기함과 동시에 어루만짐까지 포기하고 만다. 어루만짐이 외로움을 치료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 외로움, 울화, 절망감은 사람을 죽음으로 이끄는 중병이기도 하지만, 단 한 번의 어루만짐으로 없앨 수 있는 잔병이기도 하다. 234~235쪽




어루만지다

저자
고종석 지음
출판사
마음산책 | 2009-01-01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입술ㆍ주름ㆍ혀놀림..... 우리말 속으로의 탐색 말은 사랑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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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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