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시작하면서 독서일기 혹은 서평, 독후감이라 불러온 이 글들을 쓰는 일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느낌이다. 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책 안의 무엇을 누가 쓰는지, 책이 물성을 갖고 탄생하는 과정에서 편집자가 무엇을 하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책의 내용을 가장 잘 파악하려면 대체로 인터넷 서점의 책 소개 글을 읽으면 된다. 대부분의 책 소개 글은 책의 보도자료를 그대로 담고 있다. 대부분의 보도자료는 책의 가장 큰 매력을 앞부분에서 소개하고 이어 책의 내용을 요약한다. 책의 구성을 그대로 따라 요약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보도자료는 편집자가 책의 편집 과정에서 직접 쓰는 몇 안 되는 글 중 하나이다.) 따라서 내가 굳이 책의 내용을 요약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서평이란 이 요약을 바탕으로 해서 더 나아간 것을 담고 있다. 책의 내용을 전거로 삼아 서평자의 의견을 개진해야 한다. 그저 독서일기라 이름붙인 마구잡이 감상문을 쓰는 입장에서 그런 부담까지 지고 싶지는 않다. 내게 이 글들은 어느새 5년전부터 시작된 스스로와의 약속 같은 것이고, 쓰지 않으면 다 읽은 이 책들을 책장의 '읽은 책' 칸에 꽂지 못하기 때문에 써야 한다. 또 읽은 것에 대해 쓰는 일은 일을 시작하기 전부터 나의 자존감과 매우 깊게 연결되어 있어서, 하여간 나는 쓰지 않을 수도 없다. 


카버는 아버지가 알코올중독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본인도 그렇게 죽어가는 과정을 겪었으며, 그런 자기를 비웃던 딸 역시 같은 과정을 겪는 모습을 고통스럽게 지켜보다가 세상을 떠나게 된다. 저자는 카버의 문학이 이 고통의 순환을 드러내는 일이었고, 그 연원을 들여다보는 일이었으며,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이었고, 무엇보다 오래전에 사라진 아버지의 '월급 시절'을 회복하려는 안간힘이었고, 마침내 그 모든 과정을 견뎌내고 그 견뎌냄 자체가 자신의 성취였다는 것을 깨달은 자가 내놓은 인생에 대한 송가였다고 설명한다.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이 감동적인 척추는 이 책의 두꺼운 분량을 감당하기에 충분히 튼튼하다. 옮긴이의 말, 939쪽


그러니까 이런 대목을 보고 나면 이 글을 굳이 쓸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에 피식 웃고 만다. 이렇게 멋진 문장으로, 훌륭하게 책의 핵심을 짚어주고 있는데. 더구나 이 책 <레이먼드 카버: 어느 작가의 생>의 앞날개와 뒷날개에는 편집자가 쓴 책 소개글이 작은 글씨로 들어 있다. 이 글이 또 아주 근사하다. 군더더기 없고 흠 없는 문장으로 책의 내용과 주제를 충실하게 요약하고 있다. 이 글은 아마 인터넷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바로 이 종이에서만 볼 수 있는 글이다. 


책을 읽으면서 수시로 책 속 구절을 트위터에 옮겨 놓았다. 마음에 와 닿는 문장들이 너무 많았다. 레이먼드 카버, 1939년에 태어나 1988년에 죽었고, 미국 단편소설의 체호프라 불리우며,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렇게 좋아했던 소설가(하루키는 실제로 1984년 카버의 집을 아내와 함께 방문했고 그 다음해 출세작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썼다, 보네거트와 함께 카버의 소설을 한국 독자들에게 알리는 과정에서 출판사들은 하루키가 좋아한 작가 같은 카피를 쓰기도 했다). 나는 2008년에 카버의 소설을 처음 읽었다. 그 순간은 이 블로그에 있는 두 편의 연극에 대한 리뷰에 들어 있다. 이후 카버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가 되었고 <<대성당>>의 원본을 원서로 구입하기까지 했다. 영어 공부하는 셈치고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과 <대성당>을 원문 그대로 소리내어 읽어본 적도 여러번이다. 

카버의 삶에서 술, 알코올중독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다. 20대 중반부터 30대 중반까지 그는 술을 매우 많이 마셨다. 파산과, 10대 후반에 결혼해 자신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사랑해준 아내와의 결혼 생활이 파탄에 이르면서도 자신도 그의 가족도 친구들도 원인의 상당 부분이 술에 있다는 것을 몰랐다. 이 책 역시 카버의 삶을 시간순으로 따라가면서 알코올과의 관계를 절제된 문장으로 긴장감 있게 그린다. 2012년 내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를 꼽으라면 술, 특히 맥주를 사랑하게 된 것 아닐까. 하루 걸러 하루 꼴로 맥주를 마시는 동안 카버와 술의 관계를 지켜보는 일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어쨌든 내 주량으로 알코올중독에 걸리려면 턱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위안을 얻기도 했고, 술 자체에 대해서도 태어나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카버에게는 두 명의 자식이 있었다. 딸 크리스틴과 아들 밴스. 위의 옮긴이의 말에서 보듯 크리스틴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일찍 결혼해 아이를 가졌고, 오랫동안 불안정한 삶을 살았고, 알코올을 비롯한 마약중독에서 오랫동안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러나 밴스, 아들 밴스는 달랐다. 카버와 밴스의 관계가 변화하는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밴스 역시 아이들에게는 최악은 아니라 해도 좋을 것 역시 하나도 없는 가정 환경에서 어릴 적부터 마약에 손을 댔고, 십대 중후반 내내 직접 돈을 벌어야 했다. 하지만 아르바이트를 하다 만난 나이 많은 친구를 계기로 공부에 관심을 갖게 되고, 마침내 아버지가 교수로 있던 시라큐스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학사 학위를 취득한다. 20대 초반에는 프랑스에 가 불문학을 공부했고, 그의 최종 학력은 국제정치학 석사였다. 평전 앞부분의 별면에는 이 시기 밴스와 카버가 함께 찍은 사진이 실려 있는데, 둘 모두 환하게 웃고 있다. 카버는 분명, 절대로 좋은 아빠는 아니었지만, 밴스와의 관계는 카버가 보낸 마지막 10여년 동안 카버가 가족들과 맺은 관계 중에서 드물게 행복한 관계였던 것처럼 보인다.밴스는 프랑스 유학 시절 만난 독일인 스튜어디스와 결혼했고, 그 후 독일에서 17년동안 살았다고 한다. 

절반쯤 읽고 나서 후회한 게 있다. 미국 지도를 곁에 두고 읽었어야 했다. 카버가 옮겨 다닌 도시를 확인하면서, 그 동선을 그리면서, 각각의 도시에서 만난 그의 친구들 이름을 적으면서 읽으면 더 좋았을 것을 그랬다. 이 책 속에서 그려지는 카버의 여러 친구들(거의 다 작가라고 보면 된다)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따뜻함 같은 것을 느꼈다. 척 카인더, 토바이어스 울프, 리처드 포드 같은 친구들. 심지어 이런 생각도 했다. 카버가 옮겨 다닌 도시들, 그가 살았던 집들 같은 곳을 여행해 보고 싶다고. 내게는 아주 흔치 않은 일. 여행 자체를 다녀본 적이 거의 없고, 미국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더더욱 한 적 없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래도록 잊기 힘들 듯. 사람이 이래서 돈을 벌어야 하나. 

카버의 마지막 단편들은 <<대성당>>에 모두 수록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의 사후에 발표된 단편들까지 포함해 열 편에 조금 못 미치는 단편들은 <<내가 전화를 거는 곳>>이라는 이름의 책에 수록되어 있고 아직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았다. 집사재든 문동이든 조만간 나오겠지. 

올해 읽은 책 중에 가장 깊은 위안을 준 작품이었다.(900쪽이 넘는, 흉기로 써도 될 만한 책을 다 읽었다는 사실도 위안을 준다.) 사실 올해 소설은 거의 읽지 않았고, 그나마 읽은 것도 그리 마음에 닿지 않았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알겠다. 다 솜씨가 부족했던 거였다. 십 년이 넘는 자료 조사로 뒷받침되었고, 간결한 문장으로 가득한, 중심을 잃지 않는 평전이다. <<뉴욕 타임즈 북 리뷰>>가 선정한 2009년의 가장 뛰어난 책 10권에 이름을 올렸다고. 가격은 3만 8천원. 절대 후회 안 한다. 



바로 그 순간 들었던 생각을 기억한다. 내게 두 아이가 있다는 사실만큼이나 중요하고 큰 차이를 불러일으키는 일, 아니 그 근처라도 올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 그리고 내게는 항상 그 아이들이 있을 것이고, 나는 그 아이들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고 영원토록 방해받는 위치에서 벗어날 수도 없으리라는 것...... 

그것은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창문이 갑자기 열렸을 때 날카롭게 들어오는 바람처럼. 그때까지는 그저 막연하게 생각할 뿐이었다. 어떻게든 일이 풀릴 거라고-내가 내 삶에서 꿈꾸고 원하던 것들이 다 가능해질 거라고. <불>의 일부, 187쪽에서 재인용


주변 환경과 분위기의 거대한 회전바퀴가 바닥으로 내려왔을 때에는 술이 그 고통을 무디게 하고 의식이 사라지게 해주었다. 악순환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는데, 실제로 그러했다. 217쪽


'일'로서의 글쓰기의 가치에 대한 이와 유사한 의심, 문학과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사이의 이런 식의 긴장은 많은 수의 노동계급, 그리고 중산층 출신 작가들의 전기에서 드러난다. 불행하게도 카버는 체호프가 했던 것처럼 작업의 진행을 늦추고 새로운 진지함으로 작업에 임하는 식으로 자기의 딜레마를 풀어나가질 않았다. 그 대신 카버는 술을 마시면서 그 문제들을 외면하는 쪽을 택했다. 414쪽


1970년대 들어 주류 출판사들은 60년대를 통해 전 미국을 휩쓸고 지나간 변화를 반영하기 시작했다. 출판사업은 더 크고 더 빨라졌다. 더 많은 책들이 출판되었고, 전보다 더 적은 종류의 책들만 절판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대형서점들이 전통적인 서점들을 대체하기 시작했고, 출판사들이 좀더 큰 폭으로 도매할인을 하도록 만들었다. 출판사들은 이 게임에서 살아남기 위해 몇 가지 책들을 선정한 후 그에 대한 광고 예산을 대폭 늘렸다. 출판사들은 새로운 작가들 - 젊은 작가, 여성, 아시아인, 흑인 - 과, 바쁜 사람들이 읽기에 적합한 새로운 형식을 찾아 나섰다. 소설책은 삽화를 넣어 사이사이에 여백을 넉넉하게 배치한 형태가 되었고, 영화와 함께 묶어서 홍보를 했고, 대중문화에 대한 책들이 대중성을 얻게 되었다. ... 500~501쪽


카버는 후에 이렇게 말했다. "난 내가 즐겨 다루는 웨이트리스, 버스 운전수, 정비공, 호텔 청소부 같은 인물들이 그토록 곤경에 빠져 있다고 결코 느껴본 적이 없었어요. 세상에, 이 나라는 이런 사람들이 대부분이잖아요. 다들 선량한 사람들이에요. 자기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걸 하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544쪽


어느 날 밤, 브로스 도블러는 그날 오후에 자기 아파트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토록 빨리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지 레이에게 물었다. ... "정말 궁금했거든요. 그리고 레이가 한 대답이 절대 안 잊혀져요. 레이는 '그 여자가 내 넋이 나갈 정도로 박아줬어'라고 말했어요." 621쪽


내가 마이크를 가졌을 때 당신이 날 화장실까지 안아다줬었지. 너무 심하게 아팠고 또 뱃속의 아기 때문에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던 때 말이야. 당신이 날 안아서 옮겨줬어. 아무도 그렇게까진 안할 거야. 다른 사람 누구도 날 그런 식으로, 그 정도로 사랑하지는 못할 거야. 우리한텐 그런 게 있어, 뭐가 어찌됐든. 우린 다른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었고, 앞으로도 절대 그렇게 못해줄 만큼 서로를 사랑했어. <다들 어디 있지?>, 641쪽에서 재인용


레이는 맥키너니에게 직업상의 핵심 비밀을 가르쳐주었다. 글을 쓰려면 "우선 살아남아야 하고, 조용한 곳을 찾아낸 다음, 매일 열심히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699쪽


여러 해 동안 고생한 끝에 마침내 성공하게 된 느낌이 어떠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레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떻게 여기에 도달하게 됐느냐, 그건 잘 모르겠어요. 진실을 말하자면 한 번도 거기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그보다는 항상 일을 끝마치려고 애써왔어요. 그게 중요해요. 언제나 서랍속에 반쯤 마친 작품이 들어 있지 않으면 좀 초조해져요." 700쪽


카버의 작품들이 사람들을 우울하게 한다고 불평하는 이들에게 듀바는 이렇게 쓴다. "카버의 세계가 삭막하다고 슬퍼하는 건 체호프가 지겹다고 불평하는 것과 같다. 성공적인 소설, 우리가 삶을 어떻게 헤쳐나가는지에 대해 희미한 빛이라도 발하는 소설 작품은 그 핵심에서는 독자를 우울하게 만들지 않는다." 756쪽


시집 <하나의 물이 다른 물과 만나는 곳>의 마지막 행은 "그러니까, 난 당신이 고마워. 말해주고 싶었어"라고 되어 있다. 792쪽


질은 화자의 집으로 이사해 들어왔고, 커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화자는 "커튼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하지만 질에게 그렇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이 여인이 자기와 더불어 가정을 꾸려보려 하는 게 마음에 든다. 799~800쪽


카버는 자신의 시들에서 자기 자신과 갤러거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들 두 사람을 갈라놓고 있는 타자성의 틈 위로 다리를 놓으려는 생각이 없다는 점을 여러 차례 암시했다. 레이는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의 모든 것을 알려들지 않지만 그래도 자기는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 그 사실을 자기가 알고 있다는 점을 소중하게 여겼다. 812~813쪽


메리앤이 자신의 회고록에 썼듯이 레이는 "몇몇 남자들한테서 볼 수 있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태도로 약간 망설이면서" 할 수 없이 그녀가 자리를 뜨게 내버려두었다. 823쪽


그러고 나서 생각을 "표현"하는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어떤 것이 너무 복잡하거나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것처럼 보일 경우에는 신중하게, 깊이 생각해가면서 하나씩 하나씩 서술해 보려무나. 필요하다면 여러 번에 나눠서 할 수도 있지. 잡다한 것들은 다 빠지고 네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만 매끄럽고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827~828쪽




레이먼드 카버

저자
캐롤 스클레니카 지음
출판사
| 2012-07-06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은 단편소설 작가 레이먼드 카버의 연대기『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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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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