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조건 - 꽃게잡이 배에서 돼지 농장까지 대한민국 워킹푸어 잔혹사 

한승태 지음 | 시대의창 | 2013년 



지금 그 시절을 되돌아볼 때 나를 가장 놀라게 하는 건 내가 뱃일을 버텨냈다는 게 아니라 틈만 나면 배 위에서 잠이 들었다는 사실이다.(40쪽)


여느 날처럼 그동안 나온 신간 목록을 일일이 살피던 참이었다. ‘인간의 조건’이라는 제목은 이 책이 어떤 책인지 아무 정보도 전달해주지 못했다. 저자도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제목을 클릭해 서점의 도서 정보 페이지를 살펴본 이유는 전적으로 부제 때문이었다. 두 개의 구로 이루어진 부제에서 앞의 구 ‘꽃게잡이 배에서 돼지 농장까지’가 대번에 눈길을 끌었다. 그리 인상적이지 않은 뒤의 구까지 읽고 나자 이 책이 논픽션, 정확히 말하면 르포르타주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 전국을 떠돌며 닥치는 대로 일했고 일하는 틈틈이 영원히 출판되지 못할 게 분명한 시와 소설 들을 썼다. 어느 날 일을 마치고 고시원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그동안 겪어본 직업이 꽤 여러 가지였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1차, 2차, 3차 산업, 더 세밀하게는 농업, 어업, 축산업, 제조업, 서비스업계에서 모두 일해본다면 그때는 책을 한 권 써야겠다고 마음먹었고, 그렇게 했다.


책 앞날개에 적힌 저자 소개 글 중 일부다. 매우 인상적이었고 놀라웠다. 나는 지금까지 한국에서 이런 현장 체험형 논픽션을 쓸 수 있는 저자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슷한 책으로 한겨레신문 기자들이 쓴 『4천원 인생』이라는 책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잡지에 실은 글을 묶은 것이고, 저자들은 기자로서 월급을 받았으며 돌아갈 사무실도 있었다. 기자들 스스로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논픽션, 그중에서도 르포르타주를 특히 좋아했고 지금도 그렇다. 책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르포르타주를 만드는 편집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저자도 출판사도 “거의 모든 예술 영역 중 유일하게 젊은 여성의 환심을 사는 데 실패하는, 그런 장르”(11쪽)의 책을 내기란 쉽지 않다. 유명 저자가 아닌 이상 이런 장르에서 출판사가 집필 비용을 일정 부분 지원해주는 경우는 드물다. 저자는 책이 나오리라는 기약도 없이 몇 달 동안 글을 쓸 각오를 해야 하고 그동안의 생계를 감당해야 한다. 글을 완성하고 다행히 출판사와 계약하는 데 성공한다 해도, 출판사가 저자에게 시간당 최저 임금보다 많은 이익을 보장해줄 가능성은 매우 적다. 그럴 수 있을 만큼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적어도 저자에게 최저 임금은 보장해주는 편집자가 되고 싶었다. 


이틀발이 · 진도, 꽃게잡이

빈민의 호텔 · 서울, 편의점과 주유소

과자의 집의 기록 · 아산, 돼지 농장

면죄부 · 춘천, 비닐하우스

T. G. I. F. · 당진, 자동차 부품 공장

퀴닝Queening


모두 다섯 곳에서 일한 기록을 담았고 마지막 6부에 짧은 픽션이 있다. 각각의 일터에서 일한 시기를 밝혀놓지 않은 것이 아쉬웠다. 아마도 시간 순으로 배치한 것이겠지만, 내가 담당 편집자였어도 꽃게잡이 배 이야기를 무조건 첫 번째에 놓았을 것이다. 르포르타주를 읽는 독자들은 당신과 나처럼 대개 사회적으로 전형적이고 동질적이다. 위험하고 고된 현장의 이야기에 쉽게 매혹된다. 


르포르타주는 어떤 삶의 현장을 저자가 직접 체험하고 쓴 글이다. 자료 조사와 인터뷰 위주인 일반적인 논픽션과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다. 조지 오웰은 총알이 날아다니는 지붕 위에 엎드려 있는 동안 자신은 그저 배가 고팠고 집에 가고 싶었다고 썼다. 르포르타주 작가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에 더해 바로 거기 있는 자기 자신의 행동과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난 일까지 함께 기록한다. 그러려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 자기 자신을 대상화할 줄 아는 지적 능력이 필요하다. 외부 환경과 자기 사이의 상호 작용과, 바로 그 순간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마치 외부인이 관찰하듯 기록하고 분석할 줄 아는 능력. 나는 이런 자기 객관화의 능력이 지식과 다른 ‘지성’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독자가 르포르타주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작가의 지식과 경험과 안목의 범위만큼, 즉 작가의 지성의 범위만큼 이다. 독자는 작가를 통해서 낯선 삶과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작가는 독자와 그들을 이어주는 전달자이자 매개자, 거름망 같은 존재다. 이 거름망의 존재감이 르포르타주의 질을 결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기준이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아야 한다. 이야기는 작가, 즉 저자를 통해서 전달되지만 독자가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 저자의 존재가 독서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결국 저자가 자기를 드러내고 싶은 욕심을 얼마나 잘 제어하는가가 중요하다. 통찰과 허세의 차이는 아주 얇다. 독자는 저자 자체가 궁금하지 않다. 그가 전해주는 낯선 삶과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하고, 우리가 모르는 세계와 한 인간이 어떤 식으로 상호 작용하는지를 가장 내밀한 부분까지 들여다보고 싶을 뿐이다. 


간접 체험의 한계는 분명하다. 5부의 자동차 부품 공장 이야기를 읽으면서 결국 내가 떠올린 것은 2004년 겨울에 일했던 울산의 자동차 부품 공장의 모습이었다. 녹색 페인트가 칠해진 바닥, 난방도 냉방도 없는 커다란 공간, 그 공간을 꽉 채운 소음들, 컨베이어 벨트, 파키스탄에서 온 이주 노동자, 비슷한 나이의 동료들. 2005년 새해 아침을 나는 공장에서 야간조로 일하던 중에 맞았다. 부품을 실은 빠레트를 쌓으러 밖에 나갔을 때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때 공장 사람들에게 입시 준비에 실패해 입대 전까지 돈을 벌러 왔다고 거짓말했다. 나는 스스로가 주야 맞교대의 세계를 체험하러 온 외부인이라고 믿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동생, 아저씨, 형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인상적인 이유는 그들의 이야기가 함께 노동하는 자에게만 들려주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흔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와 달리 그들은 동료에게 자신의 삶을 들려주었다. 동료가 됨으로써만 들을 수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나는 14,800원으로 전해 들었다. 


"두 번째 온 아저씨도 조선족이었는데 나이가 한 50대 초반 정도 돼 보였어. 먼저 사장이랑 쭉 얘기를 했지. 사장이 하실 수 있겠냐고 물으니까, 그 북한 말투 있잖아? 그 말투로, '아, 그까이 꺼 가뿐하지요' 그러는 거야. 그래서 곧바로 나랑 일을 시작했지. 새로 도착한 나무를 트럭에서 내리는 데 통나무가 엄청 무겁거든. 내가 무거운데 옮길 수 있겠냐고 물으니까 또 '아, 그까이 꺼 가뿐하지요' 그러는 거야. 그리곤 잠바를 벗드라고. 그런데 갑자가 왼팔을 딱 잡더니 쑥 하고 뽑아버리는 거야. 그때 진짜 놀랐다. 왼팔이 어깨 바로 아래서 잘렸어. 긴팔 옷을 입고 있으니까 의수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지. 그 팔로 나무를 붙들려고 하는데, 나무가 두꺼워서 두 팔로 감싸지 않으면 안 되거든. 나도 그때서야 정신이 들어서 막 말렸지. 그래도 막무가내야. 이 정도는 가뿐하다면서. 아이고 안 된다고, 나무 떨어뜨리면 크게 다친다고 말렸지. 결국엔 사장을 불렀어. 사장도 깜짝 놀랐어. 둘이서 뜯어말렸지. 이런 팔로 일 못한다고. 그래도 자기는 할 수 있대. 나중엔 막 울면서 매달려서 10만 원인가 쥐여 주고 돌려보냈어. 나 진짜 아직까지 그 아저씨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 그까이 꺼 가뿐하지요, 어깨밖에 없는 팔로, 그까이 꺼 가뿐하지요, 그까이 꺼 가뿐하지요." 259쪽


이런 책을 만들 수 있는 편집자가 되고 싶다. 좋은 책이다. <끝>



* <월간 이리> 10월 호. 아래는 더 발췌한 구절들. 


12틀이 지나면 위험한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일부러 넘어져서 팔이나 다리를 부러뜨리는 것이었다. 파도가 높은 날에 여러 차례 기회를 찾을 수 있었다. 생각은 끝이 없었지만 끝내 실천에 옮기진 못했다. 대신 동일한 계획을 떠올리며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파도 때문에 몸을 못 가누는 척하며 누군가를 밀어버리는 것이었다. 사람이 바다에 빠지면 그를 구하는, 아니면 구하려는 척하는 동안 만이라도 쉴 수 있을 터였다.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것은 오직 소심함 때문이었다. 95쪽


농장에서는 돼지를 키우는 것뿐 아니라 죽이는 것 역시 업무의 하나였다. 이곳에선 그걸 고상하게 '도태'시킨다고 불렀다. 도태의 대상이 되는 건 수익성이 없어 보이는, 즉 왜소하고 병든 돼지들이다. 새끼 돼지는 출산 직후에도 도태당한다. 이 시기에 도태가 느는 건 농장의 관행 탓도 있다. 자돈의 폐사가 늘면 해당 돈사의 담당자가 문책을 받았다. 일부 사람들은 비실비실하고 왜소한 새끼를 미리 도태시켜버리고 사산으로 표기했다. 사산은 모돈의 결함일 뿐 작업자의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230쪽

새 직원이 며칠 일하다 그만두면 다들 말이 많아진다.
“나이를 그렇게 처먹고 그것도 못 버티나?”
“이런 일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하지? 나중에 봐봐, 몇 놈이나 한 달 버티나.”
나는 그들을 판단하고 싶지 않다. 조롱을 감수하면서 맞지 않는 일을 중간에 그만두는 사람을 나는 진심으로 존경한다. 내가 보기엔 하기 싫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삐뚤어지게 만든다. 내가 경멸하는 사람들은 황소 심줄 같은 끈기를 지닌 사람들이다. 참고 참아서 끝내는 어디선가 한자리 꿰차는 사람들. 그러니 너희들도 인생의 절반을 무의미한 일을 하며 살라고 권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 비하면 중도 포기자들은 언제 어디서고 “이제 그만!”이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라 해야겠다. 참을성 좋은 사람들은 체면이니, 부모니, 정체를 알 수 없는 명분에 충성을 다하는데,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건 여지없이 이런 부류다. 234쪽



인간의 조건

저자
한승태 지음
출판사
시대의창 | 2013-01-03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노동의 배신], ...그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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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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