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 이음책방에서 산 책. 그냥 제목도 마음에 들고 해서 샀는데 읽어보니, 절대 후회하지 않을 책이다. 얼마 전 읽은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와 비슷한 문장들이 자주 눈에 들어왔다. 지금 여기의 나를 위로해주는 문장들. 그래. 아직 때가 덜 지난 것일 뿐이야. 기다려보자, 하면서.
주로 한시들, 가끔 하이쿠 에서 한 구절을 따와 제목으로 삼고 쓴 글들을 모았다. 컨셉은 '청춘'. 성균관대 다니던 대학 시절 이야기가 1/3 정도, 김천에서 보낸 어린 시절 이야기가 1/3 정도, 전업 작가가 되기 전까지 보냈던 20대 시절과 군대 이야기가 1/3 정도 된다. 작가를 이해하는 데에도 좋은 책이다. 그가 소설가가 되기 전까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
군대 갔다와서 대학교 3학년 때 시인으로 등단했구만. 그리고 4학년 때는 소설로 작가세계 문학상을 받아? 이거이거 보통 인물이 아니었구만 원래부터. 뭐 그런 생각도 들지만, 고등학교 때까지는 철저히 자신을 이과계 인간으로 생각했었댄다. 그래도 시는 꾸준히 읽었댄다. 천문학과에 가고 싶은데 원서가 없어 고민하다 영문과에 지원했댄다. 천문학이단 영문학이든 비슷해 보여서 래나.
고등학교 시절 우연히 출판사 모니터요원 응모하려고 독후감을 보냈고 장석남 시인을 알게 된 모양이다. 그와 편지를 주고 받았고 만나기도 했고 대학에 들어가선 그와 함께 살기도 했었던 모양이다. 백일장에서 상 한 번 받아본 적 없는 자신에게 "글 잘 읽었다"고 말해준 사람, "시나 한 번 써볼깝쇼" 라는 말에 "그래 니 시 한 번 읽어보고 싶다"라고 말해준 사람, 그 덕택에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고 말하는 대목은 감동 찌이-잉. 그에 비하면 나는 더 나은 거 아닌가 몰라. 이래뵈도 고등학교 때 논술로 상 좀 받았다 이 말씀... 그래서 어쩌라고, 에휴.
난 작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여태 안 든다. 그리고 대학 졸업하고 바로 전업 작가 되겠다는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경험이란 걸 좀 해봐야 되지 않을까. 대학생 치고 상당히 다양하고 이색적인 경험을 많이 한 편이지만 아직 난 본격적인 '사회 생활'이란 걸 해본 적이 없다. 이 정도는 해보고 나서 글 써서 먹고 살겠다고 깝칠 수 있지 않을까. 뭣보다 이 책에는 김연수 자신의 그런 고민들, 그런 시간들이 담겨 있어서 위로도 되고 격려도 된다.

내 마음 한가운데는 텅 비어 있었다. 지금까지 나는 그 텅 빈 부분을 채우기 위해 살아왔다. 사랑할 만한 것이라면 무엇에든 빠져들었고 아파야만 한다면 기꺼이 아파했으며 이 생에서 다 배우지 못하면 다음 생에서 배우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그 텅 빈 부분은 채워지지 않았다. 아무리 해도. 그건 슬픈 말이다. 그리고 서른 살이 되면서 나는 내가 도넛과 같은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됐다. 빵집 아들로서 얻을 수 있는 최대한의 깨달음이었다. 나는 도넛으로 태어났다. 그 가운데가 채워지면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7쪽)
하지만 그것보다 불행한 일은 내게 아무런 목표도 없었다는 점. 취직할 생각은 애당초 없었고 그렇다고 딱히 소설가가 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 만약 주변에 마리화나라도 있었으면 그걸 피우면서 시간을 보냈을 텐데, 손 닿는 곳에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낡은 286 컴퓨터뿐이었다.
정릉 산꼭대기에 있던 자취방은 책받침만한 들창으로 보이는 교회의 십자가를 제외하면 아무런 풍경도 가지지 못한, 가난한 곳이었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 그곳에서 나는 한국어 멘트가 나오지 않는 AFKN FM을 하루종일 틀어놓고 자판을 두들기며 소설을 썼다. 왜 시간을 보내는 다양한 방법이 있지 않은가? (55쪽)
키친 테이블 노블이라는 게 있다면, 세상의 모든 키친 테이블 노블은 애잔하기 그지없다. 어떤 경우에도 그 소설은 전적으로 자신을 위해 씌어지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스탠드를 밝히고 노트를 꺼내 뭔가를 한없이 긁적여 나간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직장에서 돌아와 뭔가를 한없이 긁적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지만 긁적이는 동안, 자기 자신이 치유받는다. 그들의 작품에 열광한 수많은 독자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키친 테이블 노블이 실제로 하는 일은 그 글을 쓰는 사람을 치유하는 일이다.
그건 그렇고, 그렇다면 나는 치유받았을까? 글쎄. 그 지루했던 봄과 여름을 별다른 고민이나 사건 없이 보낸 것만은 사실이다. (60쪽)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이 내 마음을 잡아끈다. 조금만 지루하거나 힘들어도 '왜 내가 이 일을 해야만 하는 가?' 하는 의문이 솟구치는 일 따위에는 애당초 몰두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완전히 소진되고 나서도 조금 더 소진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내가 누구인지 증명해주는 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 견디면서 동시에 누릴 수 있는 일,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 (67쪽)
그 집의 식구들은 모두 스물넷에서 서른두 살 사이의 사람들이었다. 인생의 정거장 같은 나이. 늘 누군가를 새로 만나고 또 떠나보내는 데 익숙해져야만 하는 나이. 옛 가족은 떠났으나 새 가족은 이루지 못한 나이. 그 누구와도 가족처럼 지낼 수 있으나 다음날이면 남남처럼 헤어질 수 있는 나이. 그래서인지 우리는 금방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이처럼 친해질 수 있었다.(136쪽)
나는 세상에 둘도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믿었는데, 그만 1930년대 잡지 영인본을 들여다보다가 세상에는 나와 같은 사람이 무수히 많았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 나만의 것은 무엇일까? 그게, 문득 궁금해졌다. 나만의 것. 진짜 나만의 것. (140쪽)
나는 멍청하지만, 너희들은 시시하다. (187쪽)

사람들 이야기 듣기 전부터 난 김연수는 조만간 하루키 같은 작가가 될 것 같다고 지인들에게 말하고 다녔었다. 일단 자기 관리가 철저한 점이 가장 특이하고, 작품을 꾸준히 써 내는 점, 작품의 완성도가 대체로 고른 점 등. 그의 소설은 '밤은 노래한다'와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와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세 권 읽어봤다. 딱 내 스타일이야!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었지만, 참 고른 작가라고 생각했고 그가 보려고 하는 것에 호감이 갔다.
힘내시라, 김연수! 물론 지금만 해도 충분히 잘 나가고 계시지만...

청춘의 문장들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김연수 (마음산책,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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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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