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 1914~1996), 1958년 작


"나무가 없는 도시에서 살아야만 해요 바람이 불면 나무들이 울부짖어요 여긴 언제나 바람이 불죠 1년에 이틀을 빼놓곤 말이에요 제가 당신이라면 그래요 떠나가겠어요 여기 머물지 않겠어요 폭풍우가 지나간 뒤 바닷가에 죽어 있는 새들은 거의 다 바다새들이죠 폭풍우가 그치면 나무는 더 이상 울부짖지 않아요 목이 졸리는 것처럼 꽥꽥 비명을 지르는 새소리가 해변에서 들려와요 아이들은 무서워서 잠을 이루지 못하지만 전 아니에요 떠나가겠어요" (65~66쪽)

"토요일엔 특히 많아요, 이 도시에서 자기 자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탓이겠죠."(88쪽)



한 여인의 내면적인 여행 : “모데라토 칸타빌레”

0. 들어가며

  『모데라토 칸타빌레』는 어려웠다. 읽을 이의 의욕을 팍 떨어뜨리는 문장으로 시작하자니 나 역시 부끄럽다. 그러나 어려웠고, 곳곳에 등장하는 대화문과 풍경을 지목하는 서술문들의 맥락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다층적으로 해석이 가능한 오묘한 작품이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수업 시간에 나누는 이야기들은 내가 전혀 생각지 못한 구절들에서 의미의 실타래를 보여주었다. 나는 마음 속 무릎을 치며 자주 감탄했다. 왜 나는 이 실마리들을 발견해내지 못했을까. 그래서 작품을 읽는 동안 나는 마치 탐정이 된 기분이었다. 어느 곳에 숨어있을지 모를 암시, 비유, 그리하여 마침내 무릎을 치며 얽힌 실타래 속에 숨겨진 의미들의 연결망을 발견해내고 말리라는 다짐을 한 채로. 연어, 연어, 분홍색, 그래 분홍색이랬잖아! 대체 왜 모르는거야!
  그러나 결국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 눈에 안 보이는 것은 안 보이는 것이다. 남의 눈을 빌어 텍스트를 이해하려 하는 것에는 조금의 진심조차 담기가 힘들다. 언어가 담고 있는 풍경에서부터 시작해 풍경 뒤에 한 차원 더 깊이 숨겨져 있는 의미들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오직 내 몫일 뿐이니까. 그래서 내 눈에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 물고 늘어지기로 했다. 누가 뭐래든 내게 『모데라토 칸타빌레』는 ‘내 눈에 보이는 대로의 작품’이어야 한다. 이제, 내 눈에 보이는 『모데라토 칸타빌레』의 세계를 그려보자.

1. 도시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곳은 바다를 낀 작은 도시다. 3개 뿐인 공장, 부둣가 근처에 있는 작은 번화가, 번화가를 벗어나 라메르가 끝에는 부유층이 살고 있다. 이 작은 도시에서는 무언가가 계속 움직이고 인물들을 건드린다. 작가는 매우 짧은 분량의 작품 속에서 자연을 자주 언급한다. 각각의 자연물은 특정 인물과 특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인물과 인물을 둘러싼 자연환경 사이의 경계선이 흐릿하다. 소설 속 인물이 하나의 뚜렷한 인간으로 존재하기보다 바람, 석양, 바다, 향기, 소리 등과 조금씩 겹친다. 쇼뱅하면 석양빛을 떠올리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쇼뱅의 눈 속에는 석양빛이 어린다. 그 석양빛은 아마도 핏빛을 닮았을 것이다. 쇼뱅의 눈 속에서 석양빛을 발견하는 안은 며칠 전의 치정 살인을 흠칫 떠올린다. 또한, 핏빛 석양을 온 몸에 칠한 쇼뱅의 모습은 관능적이다.
  이 소도시에는 바람이 쉬지 않고 분다. “…여긴 언제나 바람이 불죠 1년에 이틀을 빼놓곤 말이에요…”.(65쪽) 안의 집 지붕 위에서 바람은 쉼 없이 불어댄다. 그 바람은 정원에 있는 쥐똥나무를 흔들어 댄다. 나무들은 그녀 이전의 오래된 여인들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쥐똥나무가 흔들어 대며 내는 “강철 같은 쇳소리”(64쪽)는 마치 심장 소리처럼 들린다. 깊고 고독한 밤, 홀로 자리에 베개에 귀를 대고 누웠을 때 들리는 것은 자신의 심장 소리 뿐이다. 그런데 바깥에서 다른 심장 소리가 들린다. 또 다른 심장의 존재에 위안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심장 소리가 인간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녀는 더욱 고독해진다. 괴로울 수밖에 없다. 옛 여인들처럼 그녀 역시 쥐똥나무의 심장 소리를 들은 채로 적막하고 거대한 집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바람, 즉 대기 없이 소리는 존재할 수 없다. 도시 구석구석을 지나치는 바람은 소리들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안은 적막한 집 안에서 소리를 그리워한다. 작품 속에는 소리들이 자주 등장한다. 사이렌 소리, 피아노 소리, 라디오 소리, 시끌벅적한 노동자들의 소리, 쥐똥나무의 심장 소리. 사이렌 소리는 무미건조하다. 응급차의 사이렌 소리처럼 두 개 음의 단조로운 반복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음이 비명을 지르듯 길게 울려 퍼지다 사그라든다. 사이렌 소리는 대화를 나누는 안에게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이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라고, 자신을 알아볼 게 틀림없는 공장의 노동자들이 까페로 들이닥칠 시간이라고, 만약 그들이 자신을 알아본다면 이 소도시에 소문이 퍼지는 것은 아주 금방일 것이라고. 부정하지 않았던 여인, 자기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빠지지 않았던 여인에게 사이렌 소리의 경고는 효과가 컸다. 그녀가 사이렌 소리의 경고를 무시하게 되는 순간은 자신이 속해 있던 사회의 규칙을 위반하기로 마음먹은(혹은 규칙의 준수를 포기하는) 순간이 된다. 초반부의 라디오 소리는 그들의 대화를 방해하는 요소였다. 언짢아하는 까페 여주인의 심정이 반영되어 있다. 후반부에서 까페 여주인은 여전히 라디오를 틀어놓지만 그들을 가능한 한 친절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결말에서 안이 문 앞에 서서 석양빛을 바라보다 까페를 떠나고 난 뒤 까페 여주인은 라디오 소리를 크게 높여 노동자들의 불평을 산다. 이 때 라디오 소리는 까페 여주인이 안에게 보내는 응원의 메시지 아니었을까. 그녀는 아마 안에게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 같은 여성으로 동료 의식을 느꼈을지 모른다.
  피아노 소리. 5장에 가서 울려 퍼지는 소나티네. 소나티네의 음률은 부둣가 전체에 아름답게 뻗어 나간다. 쇼뱅과 까페 여주인 모두 소나티네를 듣는다. 쇼뱅이 7장에서 안의 집 밖에 있는 동안, 소나티네의 음률을 흥얼거렸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소나티네는 형식이 정해진 음악이라고 한다. 앞부분의 구조를 재현하다가, 재현이 변형으로 바뀌면서 고조된 뒤 마무리되는 식이다. 이는 작품 전체의 흐름과 묘하게 대응한다. 안과 쇼뱅의 만남 이후 그들이 나누는 6~7번의 대화는 비슷하게 반복되지만 동시에 시간이 길어지고, 대화의 내용은 발전한다. 수업 시간에 들었던 ‘반복과 심화’라는 단어가 아주 적절할 것이다. 이미 그 형식이 정해져 있는 소나티네는 안 자신이 갇힌 채로 살아온 지난 세월을 일깨워주면서 그녀로 하여금 “기절할 것만 같은 생각”(79쪽)을 들게 한다. 그러나 저 아래 까페에 있는 쇼뱅과 교습소에 있는 안을 이어주는 것도 소나티네다. 5장의 피아노 레슨, 6장의 대화, 그리고 늦은 저녁 파티에 참석해 있는 안과 집 밖에 있는 쇼뱅을 교차적으로 보여주는 7장. 7장에서 쇼뱅이 “오후에 들은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은 알 수 없는 어떤 이름을 소리쳐 부르는 것과 함께, 그녀를 응원하기 위한 또 하나의 수단이었다. 

2. 갇힌 여인

  안의 일상은 틀에 박힌 것이고, 그래서 그녀는 결혼한 이후 10년 동안 오래도록 외로웠을 것이다. 남편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집에 초대해 식사를 대접할 때 그녀는 가슴에 목련꽃을 꽂고 있었다. 공장 사장의 사모님인 그녀가 하찮은 노동자들 앞에서 파격적일 정도의 패션을 선보일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그녀는 외로웠던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창 밖으로 지나가는 남자들을 흘끗 거리며 쳐다보는 것으로도 드러난다. “저 자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밤이면, 복도나 침실에서 그들을 바라보곤 했던 것 같기도 해요.”(89쪽) 이는 여성인 그녀가, 출구 없는 삶 속에서 헤매고 있는 동안, 성적 존재로서 ‘남성’들을 미지의 출구로 상정하곤 했음을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작품에서는 성적 욕망의 흔적이 간간이 드러난다. 세상 사람들이 안을 바라보는 시선은 ‘부정한 여자’이다. 그녀와 쇼뱅이 술을 마실 때 서로의 눈에 띄곤 하는 것은 서로의 ‘가혹하리만치 뚜렷한’ 입술이다. 안은 포도주를 마시며 관능에 몸을 떨기도 한다. 
 
3. 안과 쇼뱅

  안과 쇼뱅이 나누는 대화의 계기는 1장의 치정 살인이다. 쇼뱅도 안도 죽은 여자와 죽인 남자의 관계의 진실에 대해 실상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게 틀림없다. 쇼뱅과 안은 일종의 연극을 함께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두 남녀의 관계를 살인 사건 이전으로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며 재구성해 나가는데, 이 재구성된 두 남녀의 관계는 단지 알 수 없는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이는 곧 쇼뱅과 안의 관계를 구성해나가는 대화이기도 하다. 안과 쇼뱅, 그 둘 사이에 어떤 ‘행위’가 있는가? 후반부에 가서 손을 부딪히고 입술을 포개지만, 이 행위들 이전에는 오직 ‘말’ 뿐이었다. 그것도 알지도 못하는 두 남녀의 삶을 추측했을 뿐인 말들. 쇼뱅과 안이 추측하는 여인은 라메르가 끝 저택에 살고 있는 안과 구분되지 않는다. 우연한 눈 마주침, 서로를 알고자 하는 호기심어린 대화, 신체의 접촉, 입맞춤, 즉 서로를 탐하는 구애의 행위들은 타인의 삶의 이야기 위에 서 있는 것들이어서 어색하고 궁색하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강렬한 욕망이 자리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안이라는 여자의 내면적인 여행을 그리고 있다. 쇼뱅은 안의 여행이 더 깊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맡았다. 까페에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쇼뱅은 안이 아는 만큼 혹은 안이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말한다. “저는 부인과 마찬가지로 아무 것도 모릅니다. 전혀 말입니다.”(117쪽) 쇼뱅은 안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다. 안의 내면이 쇼뱅이라는 거울에 가서 한 번, 두 번 비춰질 때마다 그녀에게 돌아오는 것은 이전과는 조금씩 달라진 자신이다.
  ‘쇼뱅’이라는 이름은 ‘포도주’의 프랑스어 단어이기도 하다. 술을 마시면 대부분의 사람은 흥분이 고조되고 두려움이 가라앉는다. 마음 속 욕망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기도 하고 그것을 표현하기도 한다. 안이 계속 마셔대는 포도주나 눈 앞에 있는 쇼뱅이나, 작품 전체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마음 속 욕망을 자극하고 자신의 변화를 이끌어주며, 마침내 일탈 혹은 탈출로 향하게끔 하는 역할.
  그녀는 6장에서 대화를 나누다 소리 높여 웃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눈물을 흘린다. 쇼뱅이 그녀에게 “당신이 떠났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었으리라. 6장에서 안과 쇼뱅이 재구성한 죽은 여자와 죽인 남자의 관계에서 남자가 “떠나라”고 말하면 여자는 별말 없이 떠나 기다리지만 이내 남자에게 돌아간다. 그러나 그 남자와 달리, 쇼뱅이 직접 안의 집으로 찾아온다. “어떤 이름”을 외치며, “오후에 들은 노래”를 읊조리며 그녀를 응원한다. 집 안에 있는 안도 알고 있다.
  8장에 가서 안은 이전과 달리 쇼뱅에게 먼저 다가선다. “쇼뱅에게 다가간 것은 바로 안 데바레드였다”(113쪽). 그러나 안은 곧 망설이며 소심해진다. “그곳 전부를, 그리고 그 남자를…… 오지 않는 구원의 손길을 애원하면서.”(114쪽) 쇼뱅은 그녀가 계속 이야기하도록 재촉한다. 그 자신도 괴로워하고 있으면서도 그녀를 응원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쇼뱅이 “못하겠습니다”라며 소심하게 망설이고 있을 때, 안이 용기를 낸다. 마침내 무언가 “이루어졌다”(119쪽).

4. 달라진 안, 일어난 혁명

  쇼뱅은 “당신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며 안에게 보내는 응원이자 이별의 의지를 전달한다. 안은 “그대로 되었어요”라며 그의 응원에 답하는 동시에 이별을 허락한다. 그리고 까페를 나서는 안은 이전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안이다.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모른다. 작품이 말해주고 있지 않으니까. 여기서 하나의 힌트가 있다면 이 마지막 만남에 있어 안이 아들을 데려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6층에 있는 지로 선생의 피아노 교습소와 20미터 쯤 떨어져 있는 1층의 까페, 위와 아래에 있는 두 공간. 안이 자신의 집에서 짧은 탈출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날 “피아노 레슨을 생각해냈”(89쪽)기 때문이다. 번화가로 향하는 안의 여행은 아이의 피아노 교습이라는 명분으로만 가능하다. 즉, 아이의 피아노 교습에 동행한다는 명분 없이는 안이 번화가로 마음껏 갈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6층에 있는 피아노 교습소는 그래서 안에 대한 사회적(신분적) 구속을 상징한다. 그곳 때문에 탈출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그곳이 아니면 탈출할 수 없는 그런 처지를 말이다. 피아노 교습소에는 남편의 “시선”과 다를 바 없는 지로 선생이 있다.
  안의 일시적인 탈출 여행의 목적지는 까페이다. 그런데 까페는 6층의 피아노 교습소에 비해 한참 아래에 있다. 안이 까페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은 저 높이 있는 피아노 교습소 덕택이다. 그런데 이 형상은 그녀의 의무가 그녀의 탈출을 위에서 아래로 억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저 높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소나티네가 그토록 강력하게 부둣가 전체에 울려 퍼지는 것을 상징적으로 그녀를 구속하는 의무의 강력함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 그녀가 더 이상 아들과 함께 피아노 교습소에 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는 곧, 그녀의 일시적인 탈출 여행이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녀가 쇼뱅의 말에 자신이 죽었다고 긍정하는 것은 곧 이전과는 다른 그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앞서 이야기했었다. 그렇다면, 이후의 그녀는 더 이상 아들과 피아노 교습소로 동행하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집 밖으로 향하는 일시적인 탈출 여행 역시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래도 되었”다고? 이 말을 다른 어떤 구체적인 행위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겠지만(작품이 이 지점에서 끝났으므로) 분명 그녀가 이전과는 다른 어떤 변화를 보여줄 것임을 암시한다. 즉, 무척 사랑하지만 자신과 자신의 현실을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묶어주는 아들 없이 길을 나선 그녀가 최종적으로 달라진 것이다. 더 이상 아들 없이도, 아들과 동행한다는 명분 없이도, 그녀는 어떤 식으로든 탈출을 뜻하는 행위를 감행하게 될 것이다. 이전의 그녀는 단지 지로 선생에게 소극적으로 반항하는 아들의 모습에서 대리 만족을 느끼곤 했었지만 이제는 다를 것이다.

5. 결론

  마침내 안의 혁명은 이뤄진 셈이다. 혁명의 여정은 천천히 그리고 오직 말의 힘으로만 진행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혁명에 의심을 품었을 법하다. 과연 가능한 일인가? ‘보통 빠르기(아마도 서둘러 혁명을 이루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은 느리다고 느꼈을 게 틀림없는) 로 노래하듯이’ 한 인간이 내면의 혁명을 성공시킨다는 것이. 아주 의미심장하고 내면 깊숙이 개입할법한 충격적인 사건도 없고, 주변 인물들 모두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강력한 인물도 없다. 도시의 풍경과 인물은 희미하게 구별될 뿐이다. 그러나 이 혁명은 그녀 자신의 “죽음”으로 선언되었다. 한 인간의 내면이 죽음으로 인해 변화한다는 것은 그 어느 혁명보다도 강력하고 근본적일 것이다. 까페를 나선 안에게, ‘건투를 빈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후기.

  ‘와꾸가 잘 짜여진 작품’ 『모데라토 칸타빌레』는 읽는 이에 따라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의 격차가 무척 큰 작품인 것 같다. 잘 짜인 ‘와꾸’의 구조물 하나하나를 살펴가서 전체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면 이 작품은 분명 범상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치밀한 상상과 추리, 암시와 비유에 대한 집요한 추적에 익숙지 않거나 혹은 그러기에는 일상이 바쁜 이들에게는 오히려 피로감만 더해주는 작품일지도 모른다. 나 자신의 독서를 말하자면 둘 사이의 중간이라고 보는 게 적절하다. 다행히 수업 시간에 나누는 이야기들이 독서에 큰 도움이 되어주었지만 평일 내내 아침부터 밤 늦게 까지 이어지는 아르바이트, 학교 강의, 학원 수업 때문에 고작 주말에나 느긋하게 책을 들여다 볼 수 있어 무척 아쉬웠다. 이 정도로나마 뒤라스를 만날 수 있어 기쁠 따름이다.

모데라토 칸타빌레((문지스펙트럼:외국문학선 19)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마르그리트 뒤라스 (문학과지성사,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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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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