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뉘엘 카레르, 2000년 작

도서관에서 빌려본 책. 평소 도서관에서 책을 잘 빌려보지 않는 편이다. 도서관 서가 정리 작업(서가 Reading이라고 한다)을 하던 도중, 범죄 심리 관련한 책이 눈에 띄길래 어떤 책들이 있는지 살펴보는 중이었다. 덩치 큰 책들 사이에 작은 양장본 한 권이 꽂혀 있었다. 서가 리딩이란 게 책 등록 번호만 확인하며 넘어가는 일이기 때문에 평소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그런데 일단, 익숙한 색깔의 딱딱한 양장 커버가 눈에 띄었다. 혹시 싶어 책을 빼서 살펴 보니 역시나. 출판사 이름이 '열린책들'이다. 게다가 며칠 전 시연에서 구했던 '콧수염'의 작가 엠마뉘엘 카레르 의 작품이었다. 픽션과 논픽션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한 작품이긴 하지만 어쨌든 허구가 가미되었으므로 문학 관련 서가에 꽂혀 있어야 할 것 같다.

... 사람들은 우리 앞에 한 남자가 서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저건 더 이상 사람이 아니야. 저자는 오래전부터 사람이 아니었어. 그건 마치 시커먼 구멍 같은 거라고, 그게 곧 우리들 낯짝 위로 덮쳐 올 테니 두고 봐요. 사람들은 광기란 게 뭔지 몰라. 그거 굉장히 끔찍한 거요. 세상에 그보다 더 끔찍한 건 없다고. (50쪽)

1994년 프랑스. 한 남자가 부모, 아내, 아이들이 살해하고 스스로 자살을 시도한 뒤 자기 집에 불을 지른다.
당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남자의 자살은 미수에 그쳤고, 의식불명 상태에서 깨어나 재판을 받는다. 아마 당시 뉴스(로이터 통신 같은)를 뒤져보면 관련 기사가 꽤 많을 것 같다. 프랑스에서 엄청난 관심을 불러 일으켰음은 당연했을 테고.

작품은 마치 다큐멘터리 같아 보인다. 작중 화자의 이름은 작가와 같은 '엠마뉘엘 카레르'이다. 그는 사건을 접한 뒤 이 사건에는 드러난 것 이상의 '무엇'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가해자 장클로드 로망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러나 답장은 오지 않았다. 작가는 그 사이에 '겨울 아이'(엠마뉘엘 카레르가 '적' 이전에 쓴 소설이다)를 발표하고 사건을 잊어 간다. 2년이 지나 1995년, 카레르는 로망이 보낸 답장을 받는다. 그는 주저하는 마음을 다잡고 로망의 재판을 방청하고 친구들을 찾아 다니기 시작한다.
작품 제목인 '적'은 성경에서 사탄을 지칭할 때 쓰인 단어 라고 한다. 장클로드 로망의 내면 속에 어떤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뜻일 것 같다. 카레르가 보여주는 '로망'은 너무나 생생하다. 동시에 가능한 거리를 두려 노력한다. 로망이 말한 것 이상으로는 추측하려 하지 않는다.
로망의 살인은 논리적으로 볼 때는 평생 해온 거짓말을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게 된 한 남자의 비극적인 자기 파괴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카레르가 영감을 느꼈듯, 이 살인 사건에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스스로의 '거짓말'에 억압당하게 된 한 인간의 내면 이다. 그의 거짓말은 결국 실제의 자신이 아닌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냈다. 로망이 다중인격 환자는 아니었다. 그는 만들어낸 자신과 현실의 자신을 구분할 줄 알았다. 그는 근본적으로 소심한 성격이었고, 평생동안 거짓말이 들통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겁에 질려 있었다. 그렇지만 위기를 해결하려 하기보다 유예하고 오히려 스스로 그 위기를 심화시키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날들이 증인 없이 지나간다는 걸 나는 안다.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보낸 시간들, 더는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두려움. (94쪽)

흥미
로운 것은 그의 거짓말이 아무에게도 들통나지 않은 채 10년 이상 성공적으로 유지되어 왔다는 점이다. 이는 근대적인 외로움의 근저에 있는 '무관심'이라는 문제를 반영한다. 그가 의대 3학년 진급 시험에 합격했다고 말했을 때, 세계보건기구에서 일하고 있다고 아이들과 가족 그리고 의대 동창들에게 말했을 때, 그 누구도 그의 거짓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는 믿기 힘든 일이다. 전화 한 통으로도 충분히 들통날 법한 거짓말인데. 화자인 '카레르' 역시 믿기 힘들어 한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었다. 
로망 이라는 살인자를 다루는 프랑스 사회와 사법부의 태도 역시 흥미로웠다. 그의 죄 자체와 별도로 재판 과정에서 로망은 하나의 '연구 대상'이 된다. '대체 왜?' 라는, 하나의 극단적인 사례로서 인간 자체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여러 명의 정신과 의사들이 로망을 심문하고 보고서를 작성한다. 그들의 보고서는 그 자체로 흥미로운 정신분석학 논문이다. 물론 재판은 최종적으로 죄를 심판하기 위한 절차이다. 그러나 작품이 보여주는 프랑스의 재판은, '설명하려는 노력'에 가깝다. 죄 자체와는 별도로 말이다. 한국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여론이 보이는 반응을 떠올려보면 비교할만한 부분이 많다. 강호순 사건의 경우, 가해자의 죄는 이론의 여지가 없이 '최고형'(그러나 나는 사형에 반대한다)에 처해져야 한다. 그렇지만 '대체 왜', '무엇 때문에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납득하려는 노력은 얼마나 있었을까. 단죄함으로써 서둘러 잊으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살인 사건은 일종의 쉽게 발견하기 힘든 '사례'이기도 하다.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비인간적인 행위. 그 행위를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는 인간 자신의 본능적인 두려움,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한다. 설명하려(즉 언어화하려고) 노력할 때, 이 시대 이 공간의 인간을 조금 더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게 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우리는 충분히 알고 있다.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 진실을 대면하고 싶지 않은 두려움. 뒤틀리고 꼬여버린 한 인간의 내면이 가장 참혹한 비극을 불러 왔다. 작품을 읽는동안 빨려들어갈 듯 정신없이 읽었다. 다 읽고 난 뒤에는, 한 마디로 버겁고 힘들었다. 생각은 혼란스러웠고 가슴은 답답했다. 내게 이 작품은 '자아', 즉 '나'에 대한 이야기로 읽혔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강렬한 충격을 안겨줬다는 점에서 분명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다시 읽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내가 자살을 해버린 후에 그들의 얼굴을 볼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게임은 해볼 만한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당신의 이성, 당신의 성실성, 당신의 고통의 무게를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만 납득한다. 당신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당신의 처지는 의심스럽고 회의를 불러일으킬 뿐이다. 그러므로 구경거리를 즐길 수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그들이 믿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증명하여 그들을 놀라게 할 만하다. 하지만 당신이 죽어 버린다면 그들이 당신을 믿든 안 믿든 그건 하등 중요하지 않다. 마침내 그들의 놀라움이나 덧없는 후회를 거둬들이기 위한 자리, 모두가 꿈꿔 온 당신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한 자리에 당신은 없을 테니까...> (까뮈의 '전락'을 인용한 부분, 193~194쪽)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엠마뉘엘 카레르 (열린책들,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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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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