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이웃의 책 읽기 목록에서 알게 된 책. 만화책이다. 속지로 꽤 두꺼운 종이를 썼다. 왜 그랬을까? 그림이 모두 흑백이고 워낙 짙다보니 뒷장에 비칠까봐?(혹은 종이값 아끼려고?) 말풍선 안의 글자들은 만화가 본인이 직접 쓴 손글씨로 되어 있다. 그 어느 만화보다 독특하고, 눈길을 끈다. 손글씨들은 너무나 단정해서 컴퓨터 활자가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다.
김수박씨의 고향은 대구라고 한다. 대학도 대구에서 나왔다. 10여년 이상 대구에서 자란 나는 '대구에서 나고 자랐다'는 소개가 심상치 않아 보인다. 최근의 김현진씨 프로필은 '여아 낙태율 1위의 도시 대구에서 태어나...'로 시작한다. 나는 대구라는 도시가 딱 '고담'스럽다고 생각한다. 정말 묘한 도시다. 한 두 번 밖에 가본 적 없지만 활력이란 게 느껴졌던 부산과는 정녕 다르다. 광주엔 딱 한 번 가봤는데(망월동은 네댓번 다녀왔지만 시내에 가본 건 딱 한 번), 상무대였나, 여튼 그 동네 분위기는 대구랑 비슷했다. 
2006년에 초판 1쇄가 나왔는데, 한 달 전에 산 내 책 역시 초판 1쇄이다. 만화를 그렸던 당시는 2003년 언저리인 것으로 보인다. 책을 펴들었을 때의 첫 인상은 음울했다. 짙은 흑백 그림. 밝고 맑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 서울 풍경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여기저기서 유머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웃기려 들다니. 이 사람도 보통이 아니겠구나. 남 웃길만한 상황이 전혀 아닌데, 남을 웃기려 든다는 건 자기 자신을 위해서겠지.
친구 '칠칠이'의 편지를 받고, 몇 년 된 서울 생활을 되돌아 보며 대구로 향하는 기차 안. 그곳에서 회상이 시작된다. 기차 안에서 만난 한 아저씨, 아저씨에게 '아저씨! 내가... 좀 생각해 봤는데요... 아저씨는 실패했어요! 내가 보기엔 그래요...'라고 말하던 아가씨 같은 아줌마. 가난하고, 떠돌며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도시 곳곳에 숨어 있다. 그들과 마주칠 때 우리는 두려움을 느낀다. 지하철에서, 서울역에서, 영등포에서. 공포라기보다 두려움이다. 왜일까?
전기세와 가스비도 못낸 만화가가 결국 노가다를 했다. 셋방 주인 오건택씨, 마담 언니, 노가다판에서 만난 사람들 - 우즈벡에서 온 '우즈벡', 쉬는 날이면 피씨방에서 살다시피 하는 포커매니아 '박병구'씨, 말수 적은 황씨 아저씨, 일산에서 도예 작업실을 갖고 있지만 작업실 월세 대느라 간간이 노가다를 한다는 '재떨이'형, 우진용역 사장님. 현실에선 평범해 뵈지만 각자가 품고 있는 일상은 전혀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 주인공 '김수박'은 월세가 밀려 신축 공사 현장이던 아파트의 어느 빈 집에서 한동안 살기도 한다. 빈 집에 스티로폼을 깔고 침낭을 둘러쓰고 자는 모습. 스티로폼의 네 꼭지점엔 모기향. 여기까지만 봐도 '와...' 경탄인지 안타까움인지 모를 소리가 절로 나온다. 대구에서 올라온 이주민으로서, 만화로 돈 벌어 본 적은 한 번도 없는 배고픈 만화가로서, 30대 중반의 노총각으로서... 그의 정체성들은 막강 하다.

2권에서 계속.. 이라고 해놓구서 아직도 2권이 안 나왔다. 그 동안 다른 책을 몇 권 펴냈다. 그나마 좀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쪼들리게 살아가시는 것 같다. 사보길 잘했다. 수박이 형, 재밌고 행복하게 살아가시면 좋겠다.

1960년대, 서울의 지식인이자 모더니스트, 시인, 마포 서강에 살았던 김수영은 자신의 한 일기 서두에서 "[서울에 들어오면 서울의 풍습을 따라야 한다] 하고 집을 나왔지만 아직도 나는 서울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곧이어, "서울은 이모저모 위로 아래로 혹은 옆으로 구멍이 뚫어지라 하게 보아도 ... 몇 번씩 다시 보고 하여도 도무지 남의 것만 같다"고 한다. 강수미의 [서울생활의 발견] 중 시인 김수영의 일기를 발췌한 것을 내가 또 발췌. '도무지 남의 것만 같았던' 서울을 떠나는 내 발걸음에 신이 났다. (26쪽)
 
기차를 타고 도시를 지나가면 건물의 뒷면을 많이 보게 된다.
금이 가고, 그 금을 메꾸고, 페인트가 벗겨졌고(십년도 넘게 페인트칠 하지 않은 듯하고), 물때가 가득하고, 낡았고...
사람들이 많이 보는 앞면에는 간판과 네온싸인이 뒤덮고 있다.
도시의 뒷면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지 않지만... (혹은 외면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뒷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81쪽)


아날로그맨 1
카테고리 만화
지은이 김수박 (새만화책,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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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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