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릭 모디아노를 처음 읽는다.

의사 르네 멩트. 스스로를 '빅토르 슈마라 백작'이라고 소개하는 '무국적자' 18세 소년. 영화 배우를 꿈꾸는 미녀 이본느 자케. 이 세 인물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등장 횟수는 적지만 비중은 높은 인물들이 있는데 빅토르가 머물던 하숙집 보리수의 스파니엘 개를 닮은 노인과, 생트 로즈의 지배인 풀리가 그렇다. 두 남자는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고, 작품의 초반과 후반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대칭적인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빅토르 슈마라가 두 인물에게서 도움을 얻는 장면은 모두 그 곳을 떠날 때였다. 두 인물들은 어떤 식으로든 빅토르를 위로해주게 된다. 그의 모험을 지지하는 것이든, 아니든.

무국적자, 라는 단어가 아주 묘한 무게감을 준다. 작품의 배경은 프랑스의 어느 쇠락한 휴양 도시인 것 같다. 탐욕스러운 부르주아들, 은밀히 감춰진 성적 쾌락의 파티들. 르네 멩트와 이본느 자케는 자기들의 그런 고향을 굉장히 싫어했다. 그곳을 벗어나고자 했다. 마침내 성공한 듯 보이지만, 어찌된 일인지 몇년이 지나지 않아 둘은 다시 고향에 머물고 있다.
이들은 고향을, 그러므로 고향과 연결된 옛 기억들을, 과거를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빅토르는 그런 단호함을 발견하고 놀라워 한다. 그 자신은 작품 전체에 걸쳐 쉬지 않고 '정착'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정착을 하지 못하는 것은 무언가에 쫓기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시대적 배경이 알제리 전쟁이 활발하던 때였고 작품 초반부 빅토르가 '알제리 전쟁'을 언급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병역 거부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는 지나치게 텍스트 외적인 해석일 것 같다.
결말은 허무하다. 빅토르는 다시 떠난다. 일단 빠리 행 열차를 탄다. 그가 미국으로 떠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멩트는 12년 뒤에 자살을 한다. 그의 자살은, 옛 시기 '귀트기에'(맞나)라는 인물과 관련된 모종의 음모적인 행위에 대한 죄책감 혹은 마음의 부담 때문이었을까?

파트릭 모디아노, 한국에서 굉장히 유명한 작가이다. 소설가 신 모씨가 표절 시비에 휘말렸던 원 텍스트의 작가이기도 하고. 네버에서 검색해보면 번역된 모디아노 소설이나 평론집이 절반이고 나머지 절반은 한국 작가들의 소설집에서 그의 이름이 언급된 경우였다.
아마 그의 인기는 그의 문체와, 그의 소설이 풍기는 안개 낀 듯 아리까리한 센티멘털리즘적인 냄새 때문인 것 같다. 한국 사람들, 나를 포함해, 센티멘털리즘의 냄새에 사죽을 못 쓰는 경우 참 많다. 이게 풍부한 감수성으로 해석될 때면 긍정적인 역할도 하지만 소설 자체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는 매우 방해가 되기도 한다. 그걸 잘 못하다 보니까 나 같은 경우 그냥 꼴리는 대로 리뷰를 써대곤 했던 것이다. 작품 내부로 들어가 작품을 평가하는 게 참된 서평이고 비평이다. 최윤 선생님 수업에서 요런 걸 아주 조금 배웠다. 모디아노 본인이 멜랑꼴리한 센티멘털리스트라고 보긴 힘들다. 그의 안개 낀 듯 모호한 표현들과 문장들은 냄새를 풍기기 위해서 쓰여진 것이 아니다. 주인공을 비롯한, 아니 작품 전체를 포함하는 세계 자체의 모호함을, 어디엔가 분명 구멍이 뚫려 있어 명징적으로 언어화할(그려낼) 수가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어찌 됐든.. 빨리 읽었다.


슬픈 빌라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파트릭 모디아노 (책세상,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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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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