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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축에 드는 소설(울 학교 권장도서 100선에도 포함돼 있더라. 대학마다 대체로 비슷비슷하니 다른 학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작은 양장본이지만 500쪽 가까이 되는 분량이고 또 소설이 담고 있는 내용도 그리 가벼운 것은 아니어서 읽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네이버 어느 카페 모임에서 초판본으로 선물받았다. 다 읽고 나서 마침 후배에게 생일 선물로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대학로 이음책방에 가서 신판을 샀다. 초판과 보급판은 위 표지인데 최근의 신판 표지는 다르다. 바위 계곡이 그려져 있다. 표지 디자인한 사람이 화가라고 한다. 각 판본의 번역은 모두 10여년 전 쯤 이윤기씨가 개역했다. 초판/보급판과 신판의 차이점도 몇 가지 있는데, 신판의 속지 편집이 조금 더 멋진 것과 신판에 실린 작가 연보가 훨씬 더 자세하고 충실하다.

조르바를 묘사한 문장 중에 가장 마음에 들면서도 적절한 구절이 있다. '온몸의 체중을 실어 두 발로 대지를 밟고 있는 이 조르바 ...' 라는 구절이다. 조르바는 실존 인물이었다고 한다. 카잔차키스가 장년이었을 때 소설 속 내용과 유사한 일을 함께 했었고, 2~3년동안 함께 다녔던 것 같다. 소설 속 주인공은 아마도 작가 본인의 분신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중반을 넘어간 뒤, 책을 읽는 내내 '악마같은 책'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도덕적으로 악하다는 게 아니라, 그 정도로 '굉장하다'는 의미 그리고 혼란스러울 정도로 진지한 고민거리들을 던져둔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특히 소설이 던지는 고민거리들은 거의 다 '인간'에 대한 것이다.
한 쪽 한 쪽은 빠르게 넘어가는 것 같은데 쪽 수는 큰 진전이 없다. 고작 20쪽, 30쪽을 읽는 동안에도 조르바의 시원스러운 말과 주인공의 생각이 내 머리 속을 오래도록 온통 휘젓고 다닌다. 고전이 괜히 고전이 아니구나. 이토록 육중한 것, 책의 본래 무게 이상의 것이 담겨져 있는 것 같은 느낌, 이런 게 바로 고전이구나,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단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20세기 초반이라는 시대가 그랬겠지만, 여성에 대해 조금은 마초적으로 바라보는 것 같다. 여성을 젠틀하게 떠받드는 것도 일종의 차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조르바의 말이 옳다는 건 나도 알았다. 그러나 그럴 용기가 내겐 없었다. 나는 아무래도 인생의 길을 잘못 든 것 같았다. 타인과의 접촉은 이제 나만의 덧없는 독백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타락해 있었다. 여자와의 사랑과 책에 대한 사랑을 선택하라면 책을 선택할 정도로 타락해 있었다. (159쪽)

"...내 조국이라고 했어요? 당신은 책에 씌어져 있는 그 엉터리 수작을 다 믿어요? 당신이 믿어야 할 것은 바로 나 같은 사람이에요. 조국 같은 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 그것도 앞 뒤 헤아릴 줄 모르는 짐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나는 그 모든 걸 졸업했습니다. 내게는 끝났어요. 당신은 어떻게 되어 있어요?" (351쪽)

꺼져 가는 불 가에 홀로 앉아 나는 조르바가 한 말의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의미가 풍부하고 포근한 흙 냄새가 나는 말들이었다. 존재의 심연으로부터 그런 느낌을 갖게 되는 한 그런 말들이 따뜻한 인간미를 지니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으리. 내 말은 종이로 만들어진 것들에 지나지 않았다. 내 말들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것이었다. 말에 어떤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그 말이 품고 있는 핏방울로 가늠될 수 있으리. (431쪽)

 
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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