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절판된 책! 우연히 헌책방 들렀다가 구했다.
어디선지 기억은 안 나는데 꽤 재밌는 책이라는 이야기를 몇 번 들었다. 나는 내가 신뢰할 만한 지인의 추천이 아니라면 두 번 이상 추천받을 때만 찾아 읽는다. 이 책은 그랬다. 

최근작 <적>을 먼저 읽고 데뷔작 <콧수염>을 읽었다. <적>은 꽤 괜찮은 소설이었다. 사람 심장을 조이는 힘이 있었고, 고개를 들고 멍 때리며 사색하게 만드는 내용이었고, 무언가 더 궁금하게 만들었다. <콧수염>도 나쁘지 않은 소설이다. 그렇지만 확실히 데뷔작인 티가 난다. 문장의 생생함이 조금 덜한 느낌이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소설은 요즘 들어서는 조금 약발이 덜한, 그러나 작품이 프랑스에서 출판된 1986년에는 분명 꽤나 충격적이었을 이야기다. 주인공은 아네스와 함께 살고 있다. 둘은 부부다. 주인공은 멋진 콧수염을 가지고 있다. 아네스는 그의 콧수염이 무척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콧수염을 깎아보면 어떨까, 라며 장난스러운 생각을 하게 된다. 세면대 거울을 마주한 채 그는 아네스와 만난 이후로 단 한번도 맨살을 드러낸 적이 없는 코 아래에 면도날을 갖다 댄다. 아네스가 나간 틈을 타 실행한 일이었다. 그녀가 깜짝 놀라 반응할 것을 기대하며. 수염은 다시 자랄 것이므로.
그러나 아네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티비 드라마 줄거리를 이야기한다. 그는 참는다. 그래, 나를 골려주려는 거야. 그런 채로 친구네 집에 가서 식사를 한다. 친구들도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 콧수염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여기서부터 이 작품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는 모든 경우를 가정한다. 그들이 나를 골리기 위해서, 혹은 심지어 나를 신경쇠약으로 만들어 죽이기 위해서, 혹은 대체 왜, 그러는 것인지에 대해서. 앨범 사진을 펼쳐 보면 자신의 눈에는 분명 콧수염이 보이는데 아네스는 '당신 정신과에 가야겠다'고 말한다. 그의 모든 일상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콧수염이 무성히 자랄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그는 누구도 믿지 못한다. 심지어 살아 있다고 믿었던 아버지마저, 친구들과 아네스는 예전에 죽었다고 말한다. 사업도 생활도 엉망이 된 채로 그는 붕괴한다.
대충 이런 내용이다. 이 작품의 첫번째 강점이라면 '콧수염'이라는 소재만으로 200쪽 가량 되는 이야기를 실감나게 그려냈다는 점이다. 이야기는 한 남자가 부인에게서 시작해 세계 전체를 의심하게 되고, 마침내 스스로의 존재를 확신할 수 없게 되어 최종적으로 몰락하는 것인데, 그동안 그가 했던 의심과 불안과 두려움과 분노와 망설임을 잘 그려내고 있다. 아마도 이런 내용이 바로 '부조리'라고 부를 수 있는 것 아닐까?
책 읽은지 서너달이 넘어 사실 제대로 기억나는 건 거의 없지만 단 한 권의 책도 리뷰를 쓰지 않은 채로 넘겨버릴 수는 없겠다 싶어 이렇게 쓴다. 다시 쓰다보니 어렴풋이 기억이 나기도 한다. 재밌는 책이다. 더 이상 살 수 없는 책이다. 그리 길지 않은 책이다.

그는 자기 집에서 나왔을 법한 쓰레기 봉투를 찾아 뒤지기 시작했다. 손톱으로 파란색 비닐 쓰레기 봉투 여러 개의 배를 갈랐다. 요구르트 병과 구깃구깃한 냉동 식품 포장지를 발견하자 자기 집 쓰레기통을 이렇게 쉽게 알아보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부자들의 쓰레기, 집에서 좀처럼 식사를 하는 법이 없는 자유 분방한 부자들이 버리는 쓰레기였다. 이런 사실이 막연한 사회학적 안도감을 주었따. 쉽게 찾아내고 식별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 자기 터를 잘 닦은 사람이라는 느낌이었다. 그는 신바람이 나서 쓰레기통을 통째 보도 위에 쏟아놓았다.(62쪽)


콧수염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엠마뉘엘 카레르 (열린책들,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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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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