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의 이틀

소나무숲과 길이 있는 곳
그곳에 구월이 있다 소나무숲이
오솔길을 감추고 있는 곳 구름이 나무 한 그루를
감추고 있는 곳 그곳에 비 내리는
구월의 이틀이 있다

그 구월의 하루를
나는 숲에서 보냈다 비와
높고 낮은 나무들 아래로 새와
저녁이 함께 내리고 나는 숲을 걸어
삶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나뭇잎사귀들은
비에 부풀고 어느 곳으로 구름은
구름과 어울려 흘러갔으며

그리고 또 비가 내렸다
숲을 걸어가면 며칠째 양치류는 자라고
둥근 눈을 한 저 새들은 무엇인가
이 길 끝에 또다른 길이 있어 한 곳으로 모이고
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모래의 강물들
멀리까지 손을 뻗어 나는
언덕 하나를 붙잡는다 언덕은
손 안에서 부서져
구름이 된다

구름 위에 비를 만드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 있어 그 잎사귀를 흔들어
비를 내리고 높은 탑 위로 올라가 나는 멀리
돌들을 나르는 강물을 본다 그리고 그 너머 더 먼 곳에도
강이 있어 더욱 많은 돌들을 나르고 그 돌들이
밀려가 내 눈이 가닿지 않는 그 어디에서
한 도시를 이루고 한 나라를 이룬다 해도

소나무숲과 길이 있는 곳 그곳에
나의 구월이 있다
구월의 그 이틀이 지난 다음
그 나라에서 날아온 이상한 새들이 내
가슴에 둥지를 튼다고 해도 그 구월의 이틀 다음
새로운 태양이 빛나고 빙하시대와
짐승들이 춤추며 밀려온다 해도 나는
소나무숲이 감춘 그 오솔길 비 내리는
구월의 이틀을 본다.

류시화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에서


본래 책을 사면 작가의말 이니, 역자후기니 하는 글을 먼저 본다. 친구의 부탁으로 어제 알라딘에서 처음 책을 주문했다. 어느 프랑스 사회학자가 쓴 <모차르트 : 한 천재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이라는 책이었는데, 무쟈게 재밌어 보였다. 배송료 때문에 한 권 더 주문한 책이 장정일의 신작 <구월의 이틀>이었다.
신간 소식을 처음 접한 건 우쌤 블로그 였다. 솔직히, 난 정말이지 그의 팬이다. 사회과학자에 대해 팬심을 갖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샤워하면서 잠깐 생각해 보았는데... 그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나는 그가 '진짜'라고 믿는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여튼, 내가 좋아하는 그가 '장정일' 팬이란다. 지금껏 장정일씨의 책을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다. 그래서 이 참에 직접 확인해볼 겸, 신간이고 하니 당분간 도서관에서 못볼 게 뻔하기도 하고, 사게 되었다.
역시나 작가의말 을 읽는데, 첫 시작이 제목 '구월의 이틀'에 관한 것이었다. 제목을 류시화씨의 시에서 가져왔음을 밝힌 뒤, 3년 동안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이 시를 교재로 삼아 "문학과 청춘에 대해 내가 깨우친 것을 학생들에게 귀띔해주고자 했다"고 한다. 궁금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어 곧장 학교 도서관에서 류시화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를 빌려 읽어 보았다.
류시화씨 시집은 제대로 읽어본 게 없고, 그가 펴낸 책 하이쿠 집 <한 줄도 너무 길다>는 아주 아끼고 즐겨 읽는 책이다. '구월의 이틀'만 뽑아 읽어 보았다. 흡족할 만큼 읽어 내지는 못했지만... 소나무숲이 숨긴 오솔길을 걷는 동안, 생기고 사라지고 태어나고 사멸하는 생명으로 어우러진 하나의 세계를 발견했고, 그 세계와 인간 문명의 덧없음이 대비되는 것 같다, 정도의 생각을 했다. 왜 '구월'이고 하필 '이틀'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일단, 좋고 마음에 들어 블로그에 올려 둔다.

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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