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 우석훈 지음 / 레디앙 / 2009

    나오자 마자 산 책. 오죽하면 잘 가지도 않고 책은 더욱 사지 않는 광화문 교보에서 책을 샀을까. 
    읽는 데 꽤 오래 걸린 책. 조금 읽어 본 후의 감상은, 저자의 다른 책들만 한 무게를 담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재미는 분명 있었다. 마침 학교 과제와 조모임으로 치이던 와중이라 집 화장실에서만 읽기로 했다. 근데 또 집에서 큰일 볼 일이 드물어지면서 한달 가까이 책장에 꽂혀 있기만 했다. 마침내 어제 다 읽었다.
    네버에서 알게 된 어느 이웃이 말했듯, 180쪽 가까이 되는 앞의 글들은 모두 '그들은 관찰한 것일까, 관찰된 것일까 - 대학생들의 20대 관찰기'라는 부분을 위한 것 아닐까 싶다. 사실 책 앞부분에서 우석훈씨 본인도 애초 이 책을 출간할 생각은 없었는데 수업에서 학생들이 써 온 학원강사 관찰기를 읽고(그 중 한 편이 책에 실려 있다) 출간을 굳히게 되었다고 했다. 그 정도로 이 뒤에 실린 7편의 글은 꽤 잘 쓴 글이다. 여느 대학 교지에서도 이 정도로 잘 쓴 글은 한 두 편,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 같다. 
    '저기, 신자유주의가 걸어가고 있다.' 헤겔의 말을 패러디한 구절이다(나폴레옹을 보며 '저기 절대정신이 걸어가고 있다'라고 말했던 것). 사실, 학교 어느 구석에 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으면 저절로 나올 수 있는 말이다. 또, 연대 앞 횡단보도를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다. 체화의 수준을 뛰어 넘어 '육화'된 신자유주의, 그러니까 피와 살이 되어 버린 경쟁의 윤리를 분석하는 것도 쉽잖은 일이다. 이건 뭐, 몸 속에 숨겨져 있어 사회학적 혹은 철학적 시선조차 쉽게 가닿기 힘들고, 피와 살 속에 녹여 있으니 쉽사리 비판할 수도 없고, 해도 잘 안 먹힌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를 드러내며 쓸 때 비로소 우리 사이에서 설득력을 얻는다.
    그런 의미에서 20대의 글 7편은 빛을 발한다. 대부분 전혀 안면이 없는 이들이지만 그 중 한 분은 3년 전 쯤 만난 적이 있기도 하다. 여러 글 중에서도 '나는 왜 예뻐지고 싶었나', '웃으면서 울기'는 반짝 빛이 났다. 두 글 모두 문장이 흠잡을 데 없고, 더 큰 공통점은 '몸으로 써낸 글'이라는 점이다. 예전 김현진씨에게 어느 기자가 '당신은 무엇으로 에세이를 쓰는지, 또 당신의 글이 많이 읽히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라는 질문을 하자 '내 온갖 다양한 정체성들 - 여성, 비정규직, 대학생, 가난한 20대 등 - 이다'라는 요지의 답변을 했던 적이 있다. 지식을 통한 해석과 상상을 통해서만 뛰어난 글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김현진씨가 그랬듯, 그리고 이 두편의 글이 그렇듯. '웃으면서 울기'는 정말... 문장도 깔끔하고 내용도 적잖이 슬퍼서.
    요즘 자주 생각하는 것은 오늘날 한국의 20대들에게 과연 윤리가 있나, 하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윤리 자체가 없지는 않을 테니 그렇다면 그 윤리의 내용이 무엇이냐가 되겠다. 며칠 사이에 쉽게 내려졌는데, '돈과 미학' 두 가지로 간단히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사실상 요즘은 정말이지 "나중에 정승처럼 쓰겠다"고 말하는 대학생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그냥 개처럼 벌겠다"만 남은 거다. 그걸로 뭘 하겠다? 남자/여자 만나겠다, 차 사겠다, 집 사겠다. 그것 뿐이다. 다만 '미학'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책에서도 지적하는 부분이다. 요즘의 20대들에게 옳고 그름은 소름 돋는 지지리한 주제여도 '예쁜가 못생겼는가' 혹은 '아름다운가 추한가'는 아주 본능적으로 답이 나오는 질문이라는 점이다. 이명박, 대다수 20대들은 사실 그가 옳은지 그른지 잘 모른다. 옳으면 왜 옳은지, 그르면 왜 그른지 설명 못 한다. 근데 하나는 명확한 게, 하여간 '추하다'는 것이다. 촛불과 시민 사회의 격렬한 정치적 저항은 사회 속에서 돌고 돌아 20대에게도 마침내 가닿았다. 20대들은 자신들에게 와 닿은 정치적 구호와 메세지를 단 하나로만 이해한다. "저 인간, 하여간 추하다". 돈과 미학만 남은 세대.
    친구, 안녕? 이라고 말할 줄 아는 대학생들, 20대들이 필요하다. 맞는 말이다. 공동체를 존재 가능하게 하는 공간 자체가 대학 사회에서 급속히 사라져 버렸다. 그나마 서울대나 연대라고 해서 전혀 아쉬울 게 없는 나지만 단 하나 '아 역시 다르구나'라고 생각하는 게 있다면 학내 자치활동, 자치공간의 활성화이다. 그것만큼은 이 학교와 비교가 안 된다. 성공회대도 그런 면에서는 훨 나은 학교다. 난 그게 예전부터 아주 부러웠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난 뒤에 발췌한 구절이 있다. 나 역시 그랬다. 만약 그렇다면, 여전히 혁명이 필요한건가. 4년 전에는 혁명이라는 말에 가슴이 벌렁 거렸다. 물론 그 당시 내가 생각했던 혁명은 가두적인 혁명이었지만. 그리고 한국에서 과연 혁명이 일어날까, 맘 접은 지 이젠 꽤 되었다. 그런데 이 아저씨가 그 단어, 혁명을 잊지 말라고 한다. 다시 마음 속에 불러 내어, 상상해보라고 한다. 그의 애정이 고맙다.
 
(중략) 탈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꿈을 꾸어야 하는 지금 시기에 경제학의 용어들이 아니라 어떤 뜨거움이 그들에게 전달되어야 할 것 같다. 내가 한국 20대들과 만들고 싶은 세계는 소설책도, 영화도 많이 볼 수 있고, 마음껏 꿈꾸며, 그것을 실현해 먹고살 수 있는 곳, 누구도 누구 위에 올라서거나 누구를 불행하게 하지 않으면서 자연과 어우러져 소박하게 살 수 있는 곳이다. 최소한 20대들이 창문이라도 달린 방에서 살고, 지하나 반지하방에서 지상으로 올라와 살게 해 주고 싶다. 그리고 전 세대들처럼 인상 구기면서 살지 않고, 명랑하게 웃으면서 늘 재밌는 일들만 하면서 살아가게 해 주고 싶다. 배고프지 않고, 외롭지 않고, 잔인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사람들과 충분히 마음을 나누며 사는 삶. 이 정도의 소박한 꿈도 혁명 없이 가능하지 않단 말인가? 그렇다. 우리는 지금 명박 시대를 살고 있다. 176쪽

그러므로 지금 대학생들이 정치에 극단적으로 무관심한 진짜 이유는 대리인 운동에서 당사자 운동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배경이 될 만한 적절한 이론 등을 갖지 못한 데서 생긴 현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138~139쪽

요즘 노조가 경제적 권익은 외쳐도 되지만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안 된다는 얘기들이 '세련된 담론'인 양 나온다. 그러나 차티스트 운동 과정을 지켜보면, 자본주의에서 지금과 같은 일반 민주주의가 형성된 것은 바로 노조가 정치 참여 즉, 참정권을 요구했던 19세기 초.중반의 역사 덕분이다. 만약 지금까지도 3퍼센트 정도의 재산 좀 있는 남성들만 참정권을 가지고 있었다면 어떤 세상이 되었을까. 상상하고 싶지 않다. 노조의 힘은, 좀 더 경제적인 이익을 얻으려는 경제 투쟁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실제로는 정치에 참여하는 길을 여는 데에서 그리고 사회의 일반적인 문제에 관해 맨 앞에서 외칠 때 나오는 것임을 역사는 말해 준다. 147쪽   

Posted by 권고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