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
카테고리 정치/사회
지은이 케빈 패스모어 (뿌리와이파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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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릇된 이름붙이기는 불명료한 사태파악에서 비롯된 것이고, 불명료한 사태파악은 부적절한 처방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최소한의 준거틀이라도 마련해두는 것이 공부하는 이의 현명한 태도겠다. (중략) 현실은 이론을 거부하니 이론적 활동이 부질없어 보인다 해도 우리는 이를 포기할 수 없다. 이성적 사유를 포기하는 순간이 곧 파시스트적 열정에 몸을 맡기는 시점이다. 10쪽, 옮긴이의 말(강유원)

가슴을 뛰게 만드는 구절이다. 특히 뒤의 두 문장. 공부하는 사람, 혹은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큰 격려가 되어줄 것 같다. 그러니까, 나에게. 이 발췌문들로 리뷰를 시작하고 싶었다.

250쪽이 조금 넘고, 책도 작은 편이다. 그렇지만 아주 알찬 책이다. 내용을 포함해 '책' 자체로서 아주 잘 만들었다. 표지 디자인, 속지의 질감, 아주 가벼운 무게, 양장본이라는 점, 무리 없는 번역. 웰-메이드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a very short introduction' 시리즈 중 하나로 출판된 책이기도 하다. very short까지는 수긍이 가는데, 자연히 연상될 법한 very easy는 전혀 수긍할 수 없다. 내가 보기에는 인문, 사회과학 계열 학부생 2~3학년 정도는 되어야 그나마 따라갈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이 어려운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저자의 학문적 태도가 매우 엄격하고 정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파시즘'이라는 전간기 유럽에서 일어난 운동이 그러한 태도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파시즘이라는 단어는 사실 남발되는 편이다. 권위주의적 보수주의도 독재 정부도 모두 '파시즘'적이라며 비난 받는다. 이는 그리 좋은 현상이 아니다. '파시즘'의 개념을 명확히 정의해야 오늘날의 정치 체제들을 좀 더 명료하게 바라볼 수 있다.
2장과 7장을 제외한 나머지 장들은 모두 역사적 파시즘에 관한 부분이다. 파시즘과 계급, 파시즘과 젠더, 무솔리니의 파시즘과 히틀러의 파시즘이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 그토록 거대하고 강력한 정치 운동이 되었는지를 다룬다. 또한 파시즘이 이전 유럽 사회의 정신사 속에서 어떤 것을 유산으로 물려 받았는지, 그러나 그만의 독창적인 발명은 어떤 것인지, 등등. 아주 금방 읽을 수 있다.
발췌문 중 파시즘에 관한 정의를 담은 구절들을 따로 모아 보았다.

파시즘은 자유주의.보수주의.공산주의.사회주의.민주주의와 함께 20세기를 형성한 거대한 정치 이데올로기의 하나다. 21세기에 파시즘의 역사와 그것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클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스킨헤드와 지식인에게 호소하고, 보수주의자들과 연대하면서도 부르주아를 비난하며, 마초 스타일을 채택하면서도 기술에 열광하며, 대중을 이상화하면서도 대중사회를 경멸하고, 질서의 이름으로 폭력을 설교하는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오르테가 이 가세트Ortega y Gasset의 말대로 파시즘은 항상 'A이면서 A가 아닌 것'이다. 30쪽

1920년대 말 파시스트에 대한 유력한 이미지는, 더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고 공언하면서 사회주의자와 싸우는 미혼의 젊은 남성이 아니라, 자신의 아내는 이탈리아를 위한 아이를 낳고 자신은 새로운 국가라는 건물에서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하는 책임감 있는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이 시기 동안 파시즘을 페미니스트적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보거나 조합주의적 경제 안에 놓인 자율적 노동조합주의로 본 사람들은 좌절했다. 100쪽

이탈리아 파시즘과 독일 나치즘 사이에는 충분한 유사성이 있어서 둘 모두에 파시즘이라는 개념을 적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민족의 적을 억압하고 모든 계급과 양성을 영원히 동원되는 민족으로 통합함으로써 민족적 통일을 추구하는 운동이 권력을 잡았다. 실현이 불가능하다 해도 이것은 어쨌든 전체주의적 기획이다. 108쪽

권위주의적 보수주의는 교회, 행정기관, 군대, 군주를 통해서도 통치한다는 것이 핵심적인 요점이다. 권위주의적 보수주의는 가족과 재산을 집요하게 보호하며, 대중동원에 관심이 있는 한 기존체제의 권위의 지도 아래 대중동원을 조직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파시즘은 동원된 민중의 대표로서 새로운 엘리트에게 권력을 부여하며, 자산과 가족에 대한 방어를 동원된 국민의 요구에 종속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보수주의와 파시트드들의 적은 같기 때문에 항상 협력이 가능하다. (이하 생략) 129쪽

그러나 잘 알려진 동성애자인 룀이 나치 서열의 정상에 올랐다는 사실은, 파시즘이 민족을 우선시하기만 한다면 사회의 그늘진 곳에 있는 급진적인 것들은 모두 다 끌어당기는 대중주의적이고 반부르주아적인 정서의 힘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207쪽

1. 파시스트들은 그들만의 생각 속에서 '자신들이 정의한 그대로'의 민족적 통일의 실현을 중심목적으로 삼는다. 파시스트적인 민족이념은 정책의 모든 측면에 스며들어 있다.
2. '자신들이 정의한 그대로'라는 제한은 중요한 것이다. 파시스트들에게 있어 민족은 희박한 공기로부터 잡아챈 추상적 이념이 아니라 가부장적 가족과 현존의 소유관계에 대한 편애를 포함하는, 모든 종류의 편견에서 구축된 것이다.
3. 그렇지만 파시스트들은 가부장적 가족과 사용자의 권리가 민족의 권리와 양립하는 한에서만 그것을 옹호한다. '외국인' 가족이나 기업은 보호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보수주의자들과 달리 파시스트들은 가족이나 재산에 대한 절대적 옹호자가 아니다.
4. 파시스트들은 초민족주의자들이므로 필연적으로 모든 다른 '이즘'에 반대한다. 페미니스트와 사회주의자는 성, 계급 또는 인류애를 민족의 상위에 놓는다는 이유로 비난받는다. 그렇지만 파시스트들은 남녀와 모든 계급을 민족으로 통합하려 하기 때문에 페미니스트와 사회주의자들이 옹호하는 특정한 개혁 - 이러한 개혁이 파시스트가 정의하는 민족의 이익에 종속되는 한에 있어서 - 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관점들이 파시즘과 계급의 관계에 있어서 갖는 실제적인 함의를 검토하기 전에, 파시즘에는 그 이념을 특정한 사회계급에 호소하게 하는 내재적인 어떤 것도 없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223~225쪽

열라 길다. 사실 내가 리뷰를 쓸 때 일일이 발췌하는 이유는, 남에게 보여주려는 이유보다는 내가 다시 보기 위해서다. 인문,사회과학 서적 발췌는 나중에 학문적인 글을 쓸 때 혹여나 도움이 될까 하는 이유도 추가된다. 마지막의 긴 발췌문을 굳이 일일이 타이핑한 이유는 그 때문이다. 사실 위의 네 문항만 읽어도 저자가 만든 파시즘의 정의가 어떤 것인지 대충 알 수 있다.
'A 이면서 A가 아닌 것', 와... 정말 멋진 표현이다. 파시즘이란 게 정말 그렇지 않은가. 대중의 지지를 호소하면서도 대중을 경멸하는 이데올로기. 책에서 인상깊었던 것은, 사실 파시즘이 특별히 계급에만 호소하는 어떤 내재적인 것도 없는 이데올로기, 라는 지적이었다. 레닌, 로자까지, 당대 내노라 하는 사회주의자 + 공산주의자 들은 모두 파시즘은 포과 상태에 이른 제국주의적 자본주의가 전쟁을 통해 위기를 타개하고자 한 이데올로기 라고 입을 모아 비난했다. 또한 파시즘은 소 부르주아들에 의해 추동되었으며, 부르주아들은 이를 수동적으로 지지했다고 계급적으로 분석한다. 저자는 드러난 현상 속에서 그런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르나, 파시즘이라는 이데올로기 자체가 자본주의의 내재적 발전 및 계급 구성으로 온전히 정의되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미지를 들어 파시즘을 표현한 것은, 아주 훌륭하다. 아주 멋지다! 당시 독일의 많은 노동자, 대학 교수들, 소수의 페미니스트들까지도 파시즘을 지지했던 이유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표현이다. '싸움질만 하는 미혼의 젊은 남성'이기만 했다면 파시즘이 그러한 국민적 지지를 얻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 역시 책이 다소 어려웠던 지라, 책이 말해준 파시즘의 모든 특성을 완전히 이해하여 암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몇 가지 특징적인 특성이 기억에 남는데, 일단 파시즘은 '초(super)민족주의'적인 이데올로기라는 점, 그리고 역사적 파시즘을 언급하는 데 있어 '준 군사주의'를 빠뜨려서는 안된다는 점과 당시 유럽에서 매우 유행하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와 러시아의 공산당에 대한 위기 의식이 파시즘의 성공에 아주 큰 요인을 차지했다는 점 등이다.
아래는, 특별히 파시즘이 '근대성' 혹은 '이성'과 관련해서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요즘 하는 스터디에서 다루는 주제가 모더니티(근대성)이기도 하고, 또 지난 모임에서는 <이것이 인간인가>를 읽고 '이성'에 대해서 학문적인 논쟁이 활발하기도 했다. 그래서 따로 모아 보았다.

그렇지만 18세기의 유산은 복합적이다. 한편으로 파시즘이 계몽주의 사상에 빚진 것이 있는데, 그것은 사회가 전통에 의해 결정될 필요는 없지만, 보편적인 원리에 근거한 청사진에 따라 유기적으로 조직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는 하나의 보편적인 이상, 다시 말해 '일반의지'에 의해 통치되어야 한다는 계몽주의 사상가 루소의 개념이 특히 이와 관련되며, 이는 프랑스 혁명가들 가운데 가장 혁명적이었던 자코뱅파가 취한 입장이기도 했다. 자코뱅파는 새로운 질서를 조성하며 일반의지(또는 민족)에 대항하는 이들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폭력을 정당화했다. 그들은 사람들을 강제로 해방시키려 했다.
다른 한편으로, 파시즘은 반계몽주의 사상에도 빚지고 있다. (이하 생략) 66쪽

파시스트들은 부분적으로 당시에 근대적이고 과학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에 의해 고무된 세계관을 지지했다. 그들은 사회적 다윈주의, 그것의 프랑스적 대안인 라마르크주의, 집단심리학, 사회생물학, 군중의 과학, 신화연구에 의존했다. 이 모든 것을 연결한 것은 민족이나 인종의 성향에 대한 '과학적인' 가정이었다. 이 과학은 민족이 피할 수 없는 퇴폐적 성향을 극복하고 사활이 걸려 있는 국제적인 투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내적으로 강력하고 동질적이어야만 한다는 신념과 결합했다. 여기에서 파시스트의 사상은 예술적 모더니즘에 의해 형성되는데, 이는 세계를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고 어둡고 위협적인 것으로 인식하지만, 이 세계는 이해할 수 있으며 심지어 예술가의 특별한 기술을 통해 길들여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248~249쪽


파시즘이 무언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설명해주는 책, 을 읽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해 드린다. 아주 웰- 메이드인 책. 옥스퍼드대에서 나온 다른 a very short introduction 시리즈도 한 번 읽어보고 싶다. 

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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