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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터디에서 읽은 책. 1925년 출판되었다. 제목의 '노벨레'는 독일어로 'novel', '소설'이라고 한다. 제대로 번역한다면 '꿈의 소설'이어야 할텐데?
200쪽도 안 되는 짧은 소설이다. 영화 <아이즈와이드셧>의 원작이기도 하다. 영화를 본 것 같긴 한데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아이즈와이드셧>이라는 영화가 한국에서 유명해진 데에는 가면 무도회 장면 때문일 듯 싶다. 나도 거의 5년도 더 전의 그 어느 날 이 영화를 굳이 본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의사' 프리돌린과 '아내.어머니' 알베르티네. 두 인물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유럽 중산층 부르주아 가정을 전형적으로 대변하는 인물이다. 작품 속 배경이자 작가가 살았던 오스트리아 빈은, 유럽의 세기말적인 분위기가 가장 특색있게 드러났던 도시다.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싸이월드 배경 이미지로 흔히 보는), 정신분석학의 개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등이 모두 빈에서 살았다.
감추어진 욕망, 거의 예상치 못했던 욕망, 가장 명징하고 가장 순수한 영혼의 한가운데라 할지라도 위험천만한 돌개바람을 칙칙하게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욕망. 16~17쪽
작품은 크게 두 가지 맥락으로 읽혔다. 하나는, 프로이트가 주목했듯이, 작품 내내 '황금빛 에로스'와 '어두운 타나토스'는 서로 뒤섞이고 돌출된다. 남성과 여성의 성적 욕망이 각각 현실과 꿈의 형태로 표출된다. 여기에 결혼이라는 제도가 에로스를 어떤 식으로 다루고(혹은 굴복시키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다. 정신분석학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어 제대로 읽어내지는 못했으나 해설이 지적하듯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두 남녀의 에로스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된다는 데에 있다. 마치 영화 <숏버스>의 난교 장면을 보듯 알베르티네의 꿈 속에서는 여러 남녀가 몸을 섞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성애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여성' 알베르티네의 황금빛 에로스는 그녀의 꿈으로만 표출되지만 '남성' 프리돌린은 전혀 다르다. 그는 집에 일찍 들어가기 싫다는 이유 만으로 거리를 떠돌며 창녀들을 만난다. 작품 전체의 큰 줄거리가 사실 프리돌린의 에로스가 표출되는 여정이기도 하다. 그의 에로스는 현실화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꿈의 노벨레>의 서사를 장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른 한 가지 맥락은, 내가 더욱 흥미를 가졌던 맥락이다. 먼저 '19세기 말-20세기 초'라는 시대적 배경을 미리 상상해볼 필요가 있다. 19세기는 '자본의 시대'를 거쳐 '제국의 시대'가 만개했던 세기였다. 1871년 빠리 꼬뮌을 기점으로 사회주의 - 공산주의적 운동은 결정적으로 패퇴했다. 제국주의적 자본주의가 자신만만했던 세기였고, 그 절정은 그동안 쌓아올린 부를 세계에 과시하고자 했던 만국박람회였다. 계몽주의적 이성을 근본에 둔(그러나 계급적이어서 사실은 불완전한) 자유민주주의의 성공 가도를 달리던 유럽 부르주아들은 1차 대전을 맞으며 풍요의 세기의 종말을 목격했다.
무미건조한 일상성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실들은 무관심한 것이나 애처로운 것이나를 가릴 필요 없이 프리돌린의 머릿속을 맑게 하고 안정을 되찾게 해주는 힘이 있었다. 53쪽
그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나는 이 길을 가는 게 아니었어, 아니 감히 그렇게 하면 안 되었는데. 난 지금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74쪽
그리고 집을 나서기 위해 계단에 이르렀을 때, 그의 머릿속에는, 이 모든 질서, 이 모든 균형, 자신의 삶에 관한 이 모든 안정감은 그저 허상과 거짓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의식이 다시금 들었다. 131쪽
그러나 이제 무엇을 하나? 집으로 갈까? 갈 데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오늘은 더 이상 뭘 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내일은? 무엇을? 무엇을 해야 하지? 그는 자신이 졸렬하기 짝이 없고, 의지할 곳도 없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손가락 사이로 술술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비현실적인 것이 되었다. 그의 가정, 아내, 아이, 직업, 거기에다 자기 자신마저도 이렇게 혼란스런 생각에 파묻히자, 기계적으로 밤거리를 걷고 있는 자신마저도 실체 없는 허깨비가 된 것 같았다. 136~137쪽
이로 인해,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유럽 사회에는 일종의 '아노미 상태'가 되지 않았을까. 윤리가 실종된 상태.(지금의 한국처럼?) 좌파들은 슬금슬금 다시 맹위를 떨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총체적 혼란의 시기에서 부르주아들은 뭔가, 19세기의 유산으로부터 단절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으로부터 단절해야 하고, 무엇을 새로 만들어야 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겨난 공백의 공간에 작품이 보여주는 '에로스'의 난장이 벌어지곤 하지 않았을까. 또한 그런 시대적 상황 하에서 우생학이 하나의 '과학'으로 등장했고, 결국은 파시즘으로 이어지기도 했다.(<파시즘>을 참고.) 단절 - '집단적 오이디푸스적 전복'(당시 오스트리아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시도를 두고 이렇게 표현했다고 한다). 작품 속에서 그 단절과 전복의 흔적 - 새로운 인간상 혹은 윤리적 대안 - 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의혹에 빠져 주저했지만 그러나 동시에 희망을 가득 안고 그녀에게 물었다 : "알베르티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지?"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잠깐 동안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 "우리의 운명에 감사해야겠지요, 그 모든 모험으로부터 우린 무사히 빠져나왔잖아요 - 현실에서의 모험 그리고 꿈속에서의 모험, 이 두 가지에서 모두."
"당신도 정말 그걸 확신하오?" 그가 물었다.
"네 확신해요, 하룻밤 동안 실제로 있었던 일, 아니 한 인간의 전생생에 걸쳐서 실제로 있었던 모든 일조차도 그 사람의 가장 내면적인 진실을 동시에 의미하지 않는다는 걸 짐작하고 있기 때문에, 저는 그만큼은 확신하고 있어요."
"그리고 어떠한 꿈도," 그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순전히 꿈으로만 그치는 게 아니야."
그녀는 그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안아 가슴속 깊이 끌어안으며 말했다. "이젠 우리는 정말 깨어났군요," 그녀가 말했다. "앞으로 한동안은."
그는 '영원히'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이 말을 입 밖에 꺼내기도 전에 그녀는 그의 입술 위에 자신의 손가락을 얹고서 혼잣말인 것처럼 속삭였다 : "결코 미래를 속단하지 마세요." 163~164쪽
꿈과 현실의 모든 여정이 끝나고, 자신들의 여정을 서로에게 고백한 뒤, 프리돌린과 알베르티네가 나누는 대화이다. 특히 마지막에 굵게 표시한 문장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마치 15년 뒤의 유럽이 맞게 될 대파국, 2차 대전을 예견하는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들의 단절 그리고 전복은 불완전한 것이었다.
두어달 전 처음 읽었을 때에는 대체 이게 뭐가 재밌다는 거야... 라고 생각했었다. 두번째 읽고 나니 참 많은 게 달라 보인다.
사람들은 얼마나 실체 없는 말에 의해서 끊임없이 유혹당하고 있는지, 길거리, 운명, 타성에 젖어 습관적으로 말을 붙여놓고, 실체 없는 그 말을 가지고 판단을 내려버리는 거야. 1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