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세계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강유원 (살림,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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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계 또는 텍스트와 컨텍스트

이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의 절대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 그들은 평생 동안 살아 있는 자연만을 마주하고 살아간다. 퍼덕퍼덕 움직이는 세계가 있으니 죽어 있는 글자 따위는 눈에 담지 않는다. 책이 그들의 삶에 파고들 여지는 전혀 없으며 그런 까닭에 '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과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책을 읽지 않는 그들은 자연과 자신의 일치 속에서 살아가므로 원초적으로 행복하다. 또한 그들은 지구에게도 행복을 준다. 지구가 원하는 것은 한 치의 어김도 없이 순환의 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인데 그들은 나무를 베어 그걸로 책을 만들고 한쪽 구석에 쌓아놓는, 이른바 순환의 톱니바퀴에서 이빨을 빼내는 짓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평생을 아프리카 초원의 사자나 얼룩말처럼 살다가 어머니인 대지의 품에 안겨서 잠든다. 나서 죽을 때까지 단 한 번의 자기반성도 하지 않는다. 마치 사자가 지금까지의 얼룩말 잡아먹기를 반성하고 남은 생을 풀만 뜯어 먹으면서 살아가기로 결심하지 않는 것처럼.
사자가 위장에 탈이 나면 풀을 먹듯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 오늘날의 사람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에서 책을 읽은 이는 전체 숫자에 비해서 몇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행하고 있다 하여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며, 압도적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은 소수의 책 읽는 이들이 벌이는 일종의 음모임에 틀림없다.
책 자체가 아닌 세계, 즉 책이 놓인 공간 속에서 책의 의미를 살펴보면 '책을 읽어야 한다'는 언명의 비진리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책, 넓게 말해서 텍스트는 본래 세계라는 맥락에서 생겨났다. 즉, 세계가 텍스트에 앞서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했었다. 그런데 어느덧 텍스트는 세계를 거울처럼 반영한다는 거짓을 앞세워 자신에 앞서 있던 세계를 희롱하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터 텍스트는 그것 자체로 일정한 힘까지 가지게 되었다. 이 와중에 세계와 일치하는 점이 전혀 없는 텍스트도 생겨났다. 이것은 인간 의식의 분열인 동시에 세계의 분열이다. 결국 이것은 세계의 불행이며 그 세계 안에 살고 있는 인간의 불행이다.
(이하 생략) 3~5쪽

살림지식총서 중 한 권. 100쪽도 안 되는 문고판이다. 그런데 3쪽 분량의 서문이 책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압권이다. 이렇게 구구절절 옮길 만하다. 물론 나 스스로를 '책 읽는 자'에 위치시키고 그러므로 '병든 인간'이기도 하는 자기 규정이 적지 않은 자부심을 안겨 주기도 한다. 그러나 강유원은 '읽어야 한다'고 말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뭔가 미묘한 느낌이 있다. 에필로그에 가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고전을 직접 읽으며 고전 속의 자아를 내 몸에 통과시킴으로써 진실된 자기 자신을 찾아나가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에 뒤이어 반문한다. "그런데 그게 진실된 자아인지는 어떻게 알아?" 그리고는 답한다. "사실은 나도 잘 모르겠다"고.
그에 대한 해답은 2007년에 번역한 <파시즘>의 옮긴이의말 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현실은 이론을 거부하니 이론적 활동이 부질없어 보인다 해도 우리는 이를 포기할 수 없다. 이성적 사유를 포기하는 순간이 곧 파시스트적 열정에 몸을 맡기는 시점이다." 여기서 '현실'을 컨텍스트로, '이론'을 텍스트로 해석한다면 곧 서문과 에필로그에서 제시한 고민에 대한 대답이 된다. 짐작컨대 2004년에서 2007년 사이의 시간 동안 그가 보고 듣고 읽은 것들이 그로 하여금 새로운 대답을 내놓게끔 만들지 않았을까.

강유원이 쓴 고전 안내서는 이 책 외에도 <서구 정치사상 고전읽기>라는 책이 있다. 아는 이웃께 선물 받아 고개를 오른쪽으로 90도만 돌리면 보이는 책장에 꽂아 놓았다. 조만간 읽고 말리라, 새삼 다짐한다.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강유원이 쓰고 번역한 거의 모든 책은 그의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할 수 있다. 이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난 정말 놀랐다. 경악했다. 심지어 "아니 이게 가능한 일이야?"라고 묻기까지 했다. 그런데 가능한 일이다. 그러는 강유원씨 본인도 대단하고, 그렇게 하는 출판사도 대단하다. 각종 텍스트 뿐만 아니라 그의 강의록도 구할 수 있다. <책과 세계>는 있는지 모르겠지만 <파시즘>, <서구 정치사상 고전읽기>는 올라와 있다.
그의 문장은 쉽다. 그래서 좋다. 이 책에서 그가 제시한 고전들은 일리아스, 우정록, 갈리아 전기, 군주론, 종의 기원 등이다. 고대 고전의 목록을 선택하는 데 특정한 의미를 둔 것 같지는 않으나 근대 세계를 열어젖힌 고전들은 쉽게 납득할 만하다. 다윈의 종의 기원과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충분히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으며, 적절한 지적 자극을 얻을 수 있는 책이다.

그 자신, 영욕의 삶을 살았던 게오르그 루카치는 "분열은 철학의 필요의 원천"이라는 헤겔의 말을 진전시켜 "삶의 형식으로서뿐만 아니라 문학의 형식을 규정하고, 또 그 내용을 부여하는 것으로서의 철학이란, 언제나 내부와 외부 사이의 균열을 말해주는 하나의 징후이며, 또 자아와 세계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르고 영혼과 행위가 서로 일치하지 않음을 말해주는 하나의 표지"라고 언급한 바 있다. ...
역설적이게도 또는 방정맞게도 철학은 어렵고 힘든 시대에만 발언한다. 정말 느닷없다 싶게 나타나 엉뚱한 소리를 해대면서 그렇지 않아도 심란한 사람들의 속을 복잡하게 만들어놓는다. 세상에 정말 쓸모없는 학문이요, 작태가 아닐 수 없다. 거듭 말하지만 철학이 없는 시대는 행복한 시대이다. 그러한 시대에는 철학이 있다 해도 심오한 근본 문제를 탐구하는 대답 없는 학문이 아닌, 처세술로서의 역할을 다할 뿐이다. 그런 까닭에 루카치의 말을 뒤집으면 그것이 곧바로 행복한 시대와 철학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46~47쪽

 

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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