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천명관 (문학동네, 2004년)
상세보기


2004년에 출판되었구나. 한참 된 책이다. 책 뒤에 실린 류보선씨의 수상작가 인터뷰가 매우 흥미로웠다. 인터뷰어의 자의식으로 충만한, 그래서 더욱 재밌는 인터뷰. 그 앞에 있는 심사평들은 칭찬 일색이다. 신수정, 임철우, 은희경씨 모두. 천명관씨는 이 책과 그 뒤 작년 즈음 해서 낸 <유쾌한 하녀 마리사>가 전부인 걸로 알고 있는데, 여느 소설책의 추천평에서 심심찮게 접할 수 있는 작가가 되었다. 그만큼 이 소설책의 파급력이 만만치 않았던 것 같다.

지금은 사라진 그 프로그램, KBS '낭독의 밤'이었나? 올해 초 장기하씨가 나와 이 소설의 한 구절을 낭독한 적 있다. 한 문장이 한 쪽 가까이 되었던, '칼자국'이라는 등장인물의 인생 내력을 그 한 문장으로 설명하는 부분이었다. 책을 사놓고 아직 읽지 않고 있었던 나는 더욱 흥미가 동했다. 그는 이 책의 문체가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작품 속 화자는 변사조로 이야기를 서술한다. 마구 개입하고, 마구 줄이고, 멋대로 해석한다. 실제로 변사가 그러하듯, 독자는 극장의 청중처럼 변사가 맛깔난 말투로 풀어내는 이야기에 쏙 빠져 눈을 뗄 수가 없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동에 의해 우리가 된다.
이것은 인간의 부조리한 행동에 관한 귀납적인 설명이다. 즉 한 인물의 성격이 미리 정해져 있어 그 성격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는 행동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의 성격을 알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과연 금복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기적 같은 행운이 찾아온 것일까? 아니면, 그런 행운이 찾아왔기 때문에 그녀가 주인공이 된 것일까?'와 마찬가지로 이야기 바깥에 존재하는 불경스런 질문이며 '알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하는 것처럼 까다로운 질문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적어도 금복의 행동을 설명할 수는 있게 되었다. 그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금복은 늪지대에 벽돌공장을 지음으로써 무모하고 어리석은 여자가 되었다. 188쪽

춘희는 자신의 인생을 둘러싼 비극을 얼마나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을까? 그녀의 육체는 영원히 벗어던질 수 없는 천형의 유니폼처럼 단지 고통의 뿌리에 지나지 않았을까? 그 거대한 육체 안에 갇힌 그녀의 영혼은 어떤 것이었을까? 사람들이 그녀에게 보여줬던 불평등과 무관심, 적대감과 혐오를 그녀는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었을까? 혹, 이런 점들에 대해 궁금증을 가진 독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모두 이야기꾼이 될 충분한 자질이 있다. 왜냐하면 이야기란 바로 부조리한 인생에 대한 탐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을 설명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뭔가 불순한 의도를 가진 자들만이 세상을 쉽게 설명하려고 한다. 그들은 한 줄 또는 두 줄로 세상을 정의하고자 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명제가 그런 것이다. 
법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다. 310쪽

서재대방출을 앞두고 그동안 사놓고 읽지 않았던 책들을 얼른 읽어치워야 겠다 싶은 마음에 빼들었다. 500쪽 가까이 되지만 매우 흥미진진하여 어쩌면 이삼일 만에 다 읽을 수도 있다. 여느 심사평들이 하나같이 지적하듯, 그리고 작가 본인이 의도했듯, 이 소설은 무엇보다 이야기 혹은 서사의 힘이 매우 강렬하고 굵직하다. 노파-금복-춘희, 세 여성이 담당하는 각각의 시대는 아주 단순하게 구획하자면 전근대-근대-현대(혹은 탈근대)이다. 중반 이후 소설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대충 감을 잡게 되자 즉각 마르케스의 소설 <백년 동안의 고독>이 생각났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작가 본인이 이 작품의 모범으로 삼았을 것 같다.(아주 완벽히 성공했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이곳 이땅의 '지난 세기의 이야기'들이라 부를 수 있는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장군들이라 불리는 통치자들도 등장하고, 그 훨씬 전의 역사인 철도의 등장, 한 도시가 세워지고 번영하고 몰락하는 이야기가 서사와 함께 진행된다.

그들은 영화를 통해 인생을 이해했으며 영화는 부조리한 실존에 질서를 부여해주었다. 그들은 인생이 아름다운 모험과 달콤한 로맨스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에 행복해했고, 불가해하다고 믿었던 세상이 엄격한 시적 정의의 질서 아래 작동한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당시에 그들이 본 영화는 대부분 미국이란 나라에서 건너온 것이었는데 관객들은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인생이 너무나 멋져 보여 언제부턴가 그들을 따라 하기 시작했는가 하면 아예 그들이 사는 나라를 찾아 떠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리고 이때부터 사람들의 머릿속엔 단 하나의 명제만이 자리잡게 되었다. 그것은 너무나 강렬하고 매혹적이어서 모든 것을 건너뛰는 동시에 모든 것을 단절시키는 한편, 모든 것에 우선하고 모든 것을 포섭해서 기어이 모든 것을 이기는 것이었다. 이후, 사람들의 모든 삶의 양식을 결정짓게 만든 그 명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모든 미국적인 것은 아름답다. 275쪽

각 부마다 문체를 달리 하려 했다는 의도는 3부 춘희를 읽으면서 느낄 수 있었지만, 3부와 그 앞부분이 다르다고 느꼈을 뿐 1부와 2부 사이의 차이점은 뚜렷하지 않았다.

이 작품이 갖는 서사의 힘은 대중들을 유혹할 만하다. 또한 시간을 다루고자 했다는 점과 작품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여성이라는 점 등은 말 많은 비평가들에게 매력적이다. 솔직히 말해, 간단한 일독 만으로 리뷰를 쓰자니 부끄럽다. 꽤 이야기할 만한 구석이 많은 작품 같고, 여러 한국 소설 중에서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특이한 작품인 것 같다. 그러나 지금껏 자주 읊은 변명을 다시 한번 언급하자면, 이 글들은 서평도 아닌 단지 리뷰일 따름이라는 것. 그러므로 누군가 이 허술한 글에 마음이 동해 핸드폰 메모장에든 어디에든 "아 이 책 읽어볼만 하겠다"라며 적어둔다면 충분히 만족한다.

Posted by 권고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