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THE ROAD)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코맥 매카시 (문학동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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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런 책이 한국에서 글케나 유명해질 수 있었을까? 적지 않은 상징이 담겨 있는, 시적인 문장으로 가득한 소설이다. 그리고 소설이 그리는 세계는 암울하고 참혹하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밝히지 않지만, 눈 대신 재가 내리고 태양은 나날이 흐려져 가고 도시의 모든 것이 이미 불타고 난 뒤다. 살아남은 인간들 중 대다수가 또다시 죽어 버렸고, 나머지 극소수는 제각기 알아서 살 길을 꾸려 나간다. 자연은 인간에게 더이상 베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인간들은 서로를 잡아 먹는다.

우린 아무도 안 잡아먹을거죠, 그죠?
그래. 당연히 안 잡아먹지.
우리가 굶더라도요.
지금 굶고 있잖아.
안 굶는다고 했잖아요.
안 죽는다고 했지, 안 굶는다고 하진 않았어.
어쨌든 안 잡아먹을 거죠.
그래. 안 잡아먹어.
무슨 일이 있어도요.
우리는 좋은 사람들이니까요.
그래.
그리고 우리는 불은 운반하니까요.
우리는 불을 운반하니까. 맞아.

화려한 서사는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남쪽으로 향하는 여정을 그렸을 따름이다. 한번 더 북쪽에서 겨울을 맞이했다간 도저히 살아남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부자父子는 힘겹게 위기를 헤쳐 나가고, 몇 번의 큰 행운을 맞이할 뿐이다. 그런데 감동적이다. 곱씹을 수록 더 그렇다. 그들은 '불'을 운반한다. 후반부에 가서 아들이 아버지에게 우리가 품은 '불'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그 불은 네 안에 있는 거라고. 너야말로 이 세계에서는 불일 거라고. 그러니 살아남아 '좋은 사람들'을 찾으라고. 최고로 절망적인 상황에서 최후의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두 명의 인간이 짐승이 되어버린 동족들을 피해 남쪽으로 향하는 여정.

할 일의 목록은 없었다. 그 자체로 섭리가 되는 날. 시간. 나중은 없다. 지금이 나중이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든 것들, 너무 우아하고 아름다워 마음에 꼭 간직하고 있는 것들은 고통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슬픔과 재 속에서의 탄생. 남자는 잠든 소년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나한테는 네가 있는 거야. 64쪽

... 남자는 떠오르는 모든 기억이 그 기원에 어떤 폭력을 행사한다고 생각했다. 파티의 게임에서처럼. 말을 다음 사람에게 전달하는 게임에서처럼. 따라서 아껴야 한다. 기억하면서 바꾸어버리는 것에는 알든 모르든 아직 어떤 진실이 담겨 있으니까. 150~151쪽

...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남자는 까맣게 타버린 도서관 폐허에 서 있었다. 시커메진 책들이 물웅덩이에 잠겨 있었다. 책꽂이들은 넘어져 있었다. 줄줄이 수천 권으로 배치되어 있는 거짓말들에 대한 어떤 분노. 남자는 책 한 권을 집어들어 물을 먹은 묵직한 페이지를 넘겼다. 남자는 다가올 세계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라면 어떤 것도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래서 놀랐다. 이것들이 차지하는 공간 자체가 하나의 기대라는 것. 남자는 책을 내려놓고 마지막으로 한번 둘러본 뒤 차가운 잿빛으로 나갔다. 213쪽

맥카시는 분명 오늘날의 세계에 대한 경고의 메세지도 담고 있는 것 같다. 마지막 부분의 한 문단이 결정적이다.

한때 산의 냇물에 송어가 있었다. 송어가 호박빛 물속에 서 있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지느러미의 하얀 가장자리가 흐르는 물에 부드럽게 잔물결을 일으켰다. 손에 잡으면 이끼 냄새가 났다. 근육질에 윤기가 흘렀고 비트는 힘이 엄청났다. 등에는 벌레 먹은 자국 같은 문양이 있었다. 생성되어가는 세계의 지도였다. 지도와 미로. 되돌릴 수 없는 것, 다시는 바로잡을 수 없는 것을 그린 지도. 송어가 사는 깊은 골짜기에는 모든 것이 인간보다 오래되었으며, 그들은 콧노래로 신비를 흥얼거렸다. 323쪽

송어는 인간일 수도 있다. 송어의 문양에서 세계는 그려져 나갔다. 그리고 송어가 살았던 골짜기와 같은 세계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이고 다시는 바로잡을 수 없는 것들이다. 오늘날의 세계와 지구가 그렇다. 이미 멸종된 생물들의 종족이 그렇다. 

이런 책이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언젠가 학교 도서관 사서 선생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데, 선생님도 그러셨다. 학교 도서관에서 코맥 매카시의 '로드'라는 책의 대출순위가 무척 높은 것을 보고 놀랐었다고. 출판사 마케팅의 힘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단편소설을 써 여러 곳에 응모 중인 한 선배는 2009년에 읽은 100여권의 책 중 최고로 이 책을 꼽았다. 솔직히 말해 나는 그만큼 감동받지는 못했다. 부족한 시야와 불성실한 독서탓일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읽어볼 만한 소설이다. 시사인의 2009 올해의책 에서, 정혜윤PD는 코맥 매카시의 <국경을 넘어>를 선정했다. 간단한 소개를 읽어 보니 마음이 동했다. 기회 되는대로 더 읽어보고 싶다.

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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