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전처는 자신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늘 꿈과 닿을 수 없는 미래, 거기에 도달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과 달성에 대한 신념만을 말하는 게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부끄럽거나 그립거나 되돌리고 싶거나 되돌리고 싶지 않은 지난 일을 여러 번 되풀이해 말하면서 서로 겹쳐 있지 않던 시절을 유감스러워하며 흔쾌히 그 시절의 목격자가 되어주었다. 또한 사소하고 하찮아서 곧 기억에서 사라질 게 분명한 현재에 기꺼이 동참해주었다. 77쪽
전염의 가능성은 높았고 사망자는 점점 늘어갔으나 병에 걸릴지 안 걸릴지, 병에 걸린다고 해도 죽을지 안 죽을지 모를 일이었다. 전염병의 실체가 불분명한 가운데 일상은 그 실체를 분명히 드러냈다. 잠시만 내버려두어도 금세 균열을 만들고 깊은 틈을 벌리는 방식으로. 일상은 목을 가눌 수 없는 갓난아기와도 같았다. 평온히 엎드려 자는 듯 보이지만 언제나 돌연사의 위험을 안고 있는 갓난아기였다. 179쪽
전염의 가능성은 높았고 사망자는 점점 늘어갔으나 병에 걸릴지 안 걸릴지, 병에 걸린다고 해도 죽을지 안 죽을지 모를 일이었다. 전염병의 실체가 불분명한 가운데 일상은 그 실체를 분명히 드러냈다. 잠시만 내버려두어도 금세 균열을 만들고 깊은 틈을 벌리는 방식으로. 일상은 목을 가눌 수 없는 갓난아기와도 같았다. 평온히 엎드려 자는 듯 보이지만 언제나 돌연사의 위험을 안고 있는 갓난아기였다. 179쪽
쥐, 전염병, 도시. 몇 가지 키워드를 접하자마자 까뮈의 <페스트>를 생각했다. 내게는 경전적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 소설.
전염병이라는 소재는 그리 낯선 게 아니다. 지난 해 신종플루가 유행이었을 때 일상은 아무렇지 않은 듯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어딘가 어색했다. 불편했다. 사람들이 서로를 기피하려는 듯한 기색이 한 박자 느리게 눈에 들어오곤 했다. 고개를 돌리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그런 느낌이었다.
재밌게 읽긴 했는데. 차미령 이라는 이름의 문학평론가, 요즘 활발하게 작품 해설을 쓰고 계신 것 같다. 작품을 읽으며 여러 실마리로 풀어내기에 좋은 소설이라는 느낌을 받았었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해설은 고등어 살 발라내듯 작품을 군더더기 없이 발라내어 설명해준다. 이 해설이 지나치게 깔끔하고 확실해서 오히려 거부감이 들 정도였다.
아, 편혜영이라는 작가는 이런 소설을 쓰는구나, 이런 문장을 가지고 있구나, 이런 걸 쓰고자 했었구나. 알 수 있어서 뿌듯했다. 언제 기회가 된다면 <사육장 쪽으로>를 읽어보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