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에서 구한 책. 책 표지 바로 뒷장에 어느 중학생의 메모가 남겨져 있어 재미도 있고 해서 샀다. 김원일씨는 이전에 어느 문학잡지에서 단편(이라기보다는 실제로 어느 노인과 인터뷰한 글이었다)을 하나 읽은 적이 있었다.
마당깊은 집, 은 우선 내가 가장 오랫동안 살았던 도시 대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게 흥미로웠다. 대충 10년 정도 살았다. 처음 살았던 동네가 복현동이었고, 침산동으로 이사해서 신천 바로 근처의 아파트에 부모님이 살고 계시는데 이 동네들 지명이 나온다. 1950년대 중반 복현동은 넓은 능금밭이 있는 판자촌 동네였던 모양이고 산격동도 마찬가지였나보다. 지금은 그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다. 송죽극장이니 중앙통이니 하는 시내 지리도 거의 알아듣기 힘들었다. 중앙통은 중앙로를 말하는 모양인데.. 만경관 정도?
전쟁 중에 주인공의 아버지는 월북하고 어머니와 4남매는 스스로 살아남아야 했다. 피난 내려와 대구에 눌러살게 된 이후 여러 집에서 세를 들어 살았는데 어느 대저택에 살았던 때의 일을 그리고 있다. 안채에는 부유한 주인네가 살고 아랫채에는 모두 네 가구가 세들어 살았는데, 이 대저택에 살고 있던 20여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의 삶은 곧 전쟁이 막 끝난 50년대 중반 도시 사람들의 전형적인 삶이기도 하다.
그 시대의 사람과 풍경을 생생하게, 충실히 담았다. 불과 50여년 전 이 땅에서 일어났던 '전쟁'이란 것이, 특히 온갖 추잡스러운 음모와 살인과 학살이 쉬지 않았던 그 전쟁이, 전쟁을 겪은 사람들에게 어떤 것을 남겼는지 어린 주인공의 순진한 시선을 통해 알게 된다. 53년 체제라 불리는 전쟁의 흔적들은 여태까지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채로 남아 있다. 무수한 억울한 죽음들과 끔찍한 시간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후대의 우리들은 그 시대의 사람들과 풍경을 기억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한국의 근현대사는 너무 빨랐다. 50여년전의 어느 건물이 아직도 남아있을까? 너무 많은 것이 변했다. 내가 보고 들은 것들과 소설 속 시대는 너무 다르다.
더구나 1950년의 한반도 전쟁을 학교에서 배울 때 우리는 생명 그 자체의 소중함과, 역사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을 배우지 않았고 배울 수도 없었다. 너무나 끔찍하고 어마어마한 죽음들, 왜곡된 이념들이 만들어낸 추잡한 복수들, 그리고 내가 속해 있는 이 나라가 추악한 과정을 거쳐 건국되었음을 알게 될 뿐이다. 한국에서는, 조국의 역사 속에서 우파가 탄생할 수 없다. 이 국가의 역사 중에는 자랑할만한 게 거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소설 그 자체로 썩 재밌게 읽은 건 아니었다. 어쨌든 내가 살고 있는 이 지역의 과거이고, 기억해야할 의무가 있는 역사를 배경으로 삼았고, 지루한 것도 아니었으니 열심히 읽었다. 후반부 쯤 되자 미적지근해서 재미를 반감시칸다고 생각했던 소설의 문체가 어쩌면 그 시대를 그리는 데에 효과적인 수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