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오늘의작가총서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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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이문구 (민음사,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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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판본은 요게 아니고 97년 개정판이다. 표지는 2005년 쯤의 개정판인 것 같다.

우리 동네 김씨
우리 동네 리씨
우리 동네 최씨
우리 동네 정씨
우리 동네 류씨
우리 동네 강씨
우리 동네 장씨
우리 동네 조씨
우리 동네 황씨 

9명의 장년 남성을 주인공 삼아 동네 돌아가는 모양새를 그려낸 소설이다. '우리 동네'는 70년대 말 산업 근대화의 급격한 변화를 온몸으로 맞이하면서 혼란스러운 어느 농촌이다. 소설 속 농민들이 언급하는 것처럼 주로 후발 근대화한 나라들이 그런 방법을 취하는데, 후진국 상품의 유일한 경쟁력은 낮은 가격 뿐이다. 그런데 낮은 가격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상품 가격의 요소 중에서 '임금'을 억제시키는 게 가장 편리하다. 자본화되는 이윤을 억제하라고? 자본가들의 욕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국가로서도 어떻게든 초기 자본주의 발전 국면에서 기업을 물심양면으로 밀어줘야 하기 때문에 그러지 못한다. 그런데 마냥 임금을 낮출 수만은 없다. 노동자들의 최저 생존비는 보장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최저 생존비는 어떻게 낮출 수 있을까? 바로 농촌에서 생산되는 식량 가격을 낮추면 되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에는 조선에서 식량을 대량으로 약탈해 본국에 보내면서 동시에 자국의 잉여 노동력을 조선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취했다. 식민지가 있던 대부분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이런 방법으로 자국의 고통을 최소화시키기도 했지만, 영국 프랑스 등의 최초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오히려 이를 이용해 더욱 자국 노동자들을 착취했었다. 하여간에 자본주의란...

한국도 마찬가지다. 70년대는 이전 시대에 비해서는 확실히 살림이 나아지긴 했지만, 그래서 '절대적' 빈곤은 줄되 '상대적' 빈곤이 더 심해졌다고 쉽게 말은 하지만, 이게 참 간편한 말이다. 50여 년 전에 니들 아버지 어무니들은 다 굶고 그랬어! 라고 말한들 내가 당장 취업에 번번이 낙방하고 기어코 취직한 곳은 한달에 100만원 조금 넘는 비정규직인데, 어쩌라고?,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은 아주 당연하다. 그런 말을 하는 꼰대들은 조금 더 현실의 고통을 인내하라는 뜻으로 충고 아닌 충고를 하는 것인데 대체 언제까지 인내하라는 것인지. 한국 경제가 힘들다 힘들다 해도 현대니 삼성이니 재벌 기업 대다수는 엄청난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그 흑자가 국내 취업률을 상승시키거나 임금으로 이어져 소비 증가에 이어지는 것만도 아니다. 금융을 비롯한 심각한 대외 개방으로 외국 자본과 이젠 떨어지기 힘들 정도로 얽혀 있고 흔히 알듯이 많은 공장이 해외로 이전한 지가 이미 오래기 때문이다.

소설 외적인 알멩이없는 이야기만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았네. 이 연작 소설들을 읽으면서 이 정도 사정은 알고 있는 게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이 아저씨 9명 중에 7~8명은 같은 동네 관향리에서 사는 것 같다. 한 사람을 다룰 때 조연으로 등장하는 이가 다른 단편에서 주인공으로 나오기도 하니까 알 수 있다.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황씨만은 다른 동네 사는 사람 같은데.

아, 이 능글능글한 입솜씨가 참 경이로울 정도이다. 처음에는 모르는 어휘가 너무 많아서, 심지어 대화 사이의 문장에서조차 그래서 좀 짜증이 날 정도였는데 관촌수필도 그랬지만 읽다보면 대충 무슨 말인지 알아듣게 된다. 오죽하면 이문구 소설 어휘들로 사전을 만들겠는가. 충청도 사람들이 원래 이런 건지 온갖 말꼬투리며 속담이며 격언들을 근거 삼아 둥글둥글허게 돌아가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게, 생생히 들려오는 것만 같아서... 입가에 히죽히죽 대는 웃음이 쉼없다.

"옳지, 그렇게 쓸 것만 닮어라. 그늠으 크릿스마쓴지 급살을 맞쓴지는 왜 생겨설랑 웂는 집 새끼덜 간뎅이만 덜렁그리게 허는구..." (우리 동네 리씨, 40쪽)

우리동네 류씨 아저씨 편은 아저씨 이야기보다는 요구르트 배달을 한다 하여 류그르트 라 불리는 부인 이야기가 중심이다. 남묘호렝게교 남묘호렝게교, 중얼대는 기도 소리로 보아 이게 무슨 종교더라... 기억이 안 난다. 이 단편의 이야기들도 참 흥미롭다. 이쁜이계 라는게 있는데, 여자들이 애 낳느라 헐거워진 성기를 좁히는 수술을 하기 위한 모임이란다. 정말 이런게 있었을까? 반신반의하던 농촌 아낙들도 남편들이 낮은 곡식 가격에 술김에 합동으로 바람을 피우자 얼른 계를 하자며 달려 든다.

한편 놀라웠던 것은 사실 당시의 농민들의 지적 수준이 낮았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고 있었다. 뭐 투표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지 않나. 지금도 마찬가지이고. 근데 이 사람들이 예상외로 세상사 돌아가는 모양새에 대해서도 아는 게 많으시고 가끔 번뜩이는 통찰이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교육열이라는 것이 좀 다른 면으로 보면 '앎에 대한 욕구' 때문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안의 말에 억지가 섞여 있어서는 아니었다. 근래에 행정부서를 시켜 떠들게 하는 이른바 충효사사으이 내막을 예전 것으로 아는 원호 가족이어서도 아니었다. 그는 본래가 들먹고 어리뜩하여, 하라면 하라는 대로 아무 줏대 없이 넘어갔는데, 그렇게 해야만 수더분하고 착하게 알아주며, 그것에 곧 대접이라고 믿는 어리무던한 사내의 본보기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죄 중에서도 그 큼이 모르는 죄에 견줄 만한 것이 없음을 강으로 하여금 매양 새로이 깨치도록 해준 터이기도 했다. (우리 동네 강씨, 264쪽)

농촌의 전근대적인 풍습은 폐해가 참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가장 크게 가부장제의 강고함을 들 수 있다. 이 점만으로도 옛 농촌의 모습을 미화하는 것이 망설여진다. 작가 이문구가 이를 큰 문제로 생각한 것 같지는 않다. 작가는 농촌의 옛 모습을 그리워한다. 나도 단지 고리타분한 옛 시절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면 그가 그리는 농촌의 모습에서 포근함을 느끼고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마당에 평상이나 멍석을 펴고 모깃불을 놓으면 절로 땀이 가시고, 끓는 화덕에서 갓 떠낸 수제비를 훌훌 들이마셔도 더운 법이 없었다. 뉘집 마당을 가보아도 으레 이웃집 마실꾼이 있게 마련이고, 가리마 타고 흐르는 은하수나 가끔 훑어가며 논밭 되어가는 이야기, 나가서 묻혀 들인 시국 이야기로 담배가 떨어져가도 심심한 줄을 몰랐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그런 풍속이 되풀이될 성싶지 않았다.
아무리 삶는 날이라도 TV 앞에다 상을 놓았고, 그 바람에 하늘이 덮이기 무섭게 대문부터 걸어닫지 않는 집이 없었다. 안식구따라 사내들마저 그 지경이고 보니 더러 들어볼 말이 있어도 마실 갈 데가 없었다. 내집 뉘집 없이 낮에는 죄다 들에 나가 살고 날만 저물면 빗장 걸고 틀어박히기를 다투니, 추녀를 나란히 하고 한 우물을 길어 먹는 이웃 사람도 며칠씩 얼굴 얻어보기가 어려웠다. 그러니 동네에 무슨 일이 생겨도 일삼아 가보기 전에는 얼굴 한 번 내밀지 않던 것이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 동네 황씨, 368쪽)

김씨의 말이다. 특히 마지막 '우리 동네 황씨'에서 농촌 현실에 대한 비판과, 농약을 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무지한 도시 사람의 소비 풍속을 비판한다. 그 중에서도 백미가 이 말이다.

"내가 헐라는 말은 저기여. 벨 것이 아니라, 하늘을 쳐다보구 땅만 믿구 사는 우리찌리는 여전히 경우가 있구, 이웃두 있구, 우정두 있구 이런 것 저런 것 다 분별이 있는디, 직업이 사람을 상대루 허는 직업은 우리가 마소나 들풀이나 돌멩이 같은 다른 저기들과 다름웂이 뵈는 모양여. 우리가 있음으루 해서 각기 직업도 생긴 겐디, 그 직업을 한 번 붙잡었다 허면 우신 인심부터 내버리고 저기허더란 말여. 직업을 권세루 알기루 말헐 것 같으면 하늘을 입구 흙을 먹는 우리네 위로 올러슬 것이 웂을 텐디두... 그러나 우리를 업신여긴 것치구 오래 안 가데. 나는 배움이 웂어서 지난 역사를 저기헐 수는 웂지만 아마 사람 위에 올러스려고 버둥댄 것치구 저기헌 적이 웂을겨. 그랬으니께 오늘날에 우리가 있는 게구, 우리는 또 자식들이 사는 걸 저기하면서 저기허는 게구..." (우리 동네 황씨, 411쪽~412쪽)

이게 작가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일 것이다. '아마 사람 위에 올러스려고 버둥댄 것치구 저기헌 적이 웂을겨'라고 말한 것이다. 일갈하고 싶은 마음도 있을 법한데 끝내 마지막 부분에나 숨겨두고서는 온갖 인간 군상들이 사는 모양새를 능글능글허게 지긋허게 그려내면서 읽는 사람 히죽대게 만들어놓고서는 이렇게 가슴 찔리게 말해버린다. 휴

이문구 선생이 이제는 고 이문구 선생이 되었다는 게 새삼 슬프다. 그의 작품은 꼭 다 읽어보고 말겠다.

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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