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앞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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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 (문학동네,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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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의  몇 몇 지인들이 추천해준 것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마침 이적씨의 서재에 이 책이 추천돼 있는 걸 발견하고는 바로 샀다.

요즘 가장 좋아하는 외국 작가를 꼽으라면 주저없이 로맹 가리 이다. 오래 전에 읽은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는 표제작이 워낙 어렵게 느껴져서 별 감흥이 없었는데 얼마 전 '하늘의 뿌리'가 아주 좋았다. 모렐의 말들을 아직도 인상깊게 기억하고 있고 무자비할 정도로 초원을 질주하는 코끼리떼를 가끔 길을 걸을 때나 지하철 안에서 상상한다.

'하늘의 뿌리'는 1914년 생 작가가 42세였던 1956년에 공쿠르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당시 볼리비아 주재 프랑스 대사관 대리대사였던 그는 이 작품으로 정계와 예술계 모두에서 스타덤에 올랐다고 한다. 그리고 1975년, 61세에 에밀 아자르 라는 이름으로 '자기 앞의 생'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이 그 해 공쿠르 상을 수상하게 된다. 한번 수상한 작가에게 수여하지 않는 공쿠르상을 또 받게 되자, 오촌 조카를 내세워 수상을 거절하는 편지를 쓰는데, 수상단은 "우리는 작가가 아니라 한 권의 책에 투표한 것이므로, 탄생과 죽임이 그렇듯, 공쿠르상은 수락할 수도 거절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마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ㅎ

열네 살 모모(모하메드)의 이야기, 자기 앞의 생. 자기를 맡아 키워준 로자 아줌마, 많은 것을 가르쳐준 회교도 하밀 할아버지, 착한 카츠 선생님, 세네갈 권투 챔피언 출신의 남장 여자이자 '성녀'같은 롤라 아줌마, 엘리베이터도 없는 7층 아파트에 살고 있는 이웃의 도움으로 모모는 좌절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다.

아주 감동적이고 재밌다. 모모라는 인물이 엄청나게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발레리 제나티의 '가자에 띄운 편지'의 나임이 생각날 정도로, 생생했다. 14살 모모의 심정,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어색함이나 의심없이 '14살' 소년의 외로움과 고통스러움과 혼란스러움이 정직하게 느껴졌다.

그런 감정은 내 속에서 치밀어오른 것이었고, 그래서 더욱 위험했다. 발길로 엉덩이를 차인다든가 하는 밖으로부터의 폭력은 도망가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안에서 생기는 폭력은 피할 길이 없다. 그럴 때면 나는 무작정 뛰쳐나가 그대로 사라져버리고만 싶어진다. 마치 내 속에 다른 녀석이 살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울부짖고 땅바닥에 뒹굴고 벽에 머리를 찧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그 녀석이 다리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니까. 아무도 마음속에 다리 따위를 가지고 있지는 않으니까. 그래도 이렇게 애기하고 나니까 기분이 좀 나아진다. 그 녀석이 조금은 밖으로 나가버린 기분이다. 여러분은 내 말을 이해하는지? (62~63쪽)

내 앞의 생, 이라는 것을 나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삶을 나와 분리된 삶 그자체로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는 별도로 두고 삶이 나를 잔인하게 팽개칠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살아왔다. 내 삶은 아직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이리로 구르고 저리로 굴러서 구질구질해진다 하더라도 여전히 내 결정과 판단에 굴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모모의 삶은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하밀 할아버지는 인정이란, 인생이라는 커다란 책 속의 쉼표에 불과하다고 말하는데, 나는 노인네가 하는 그런 바보 같은 소리에 뭐라 덧붙일 말이 없다. 로자 아줌마가 유태인의 눈을 한 채 나를 바라볼 때면 인정은 쉼표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쉼표가 아니라, 차라리 인생 전체를 담은 커다란 책 같았고, 나는 그 책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로자 아줌마를 위해 기도하려고 회교 사원에 두 번 간 적이 있었는데, 회교 사원의 힘이 유태인들에게는 별 효험이 없는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114쪽)

그리고 모모의 눈은 가장 정직하고 투명한 시험지이다.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이 어떠한가 가 곧, 세상을 판가름하는 기준이다.

내 의견을 말하자면, 무장강도 같은 사람들이 그렇게 된 것은 어렸을 때 사람들이 찾아내서 보살펴주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세상에는 아이들이 너무 많아 일일이 보살펴줄 수가 없다. 그래서 아이들은 사람들의 눈에 띄려고 떼지어 다니기도 하고 심지어 굶어 죽기도 한다. 로자 아줌마는 죽어가는 아이들이 수백만 명이나 되며, 그런 자신을 사진 찍게 하는 아이들까지 있다고 했다. 인류의 적은 바로 남자의 성기이며 가장 훌륭한 의사는 예수인데, 그 이유는 그가 남자의 성기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도 했다. (141쪽)

아래 모모의 말이 가장 슬펐다. 모모의 말에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착한 카츠 선생님의 얼굴. 그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로맹 가리는 자신의 손으로 생을 마감했다. 책을 읽으면서 안락사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됐다.

"... 이 세상에서 좋은 일을 많이 했다는 엄마의 엉덩이는 이제 하느님이 차지하고 있겠죠. 이제 모두 다 지겨워요. 로자 아줌마만 빼고요. 아줌마는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 사람이에요. 의사들을 즐겁게 해주자고 아줌마를 식물처럼 살게 해서 세계 챔피언이 되게 할 생각은 없어요. 내가 불쌍한 사람들 얘기를 쓸 때는 누굴 죽이지 않고도 하고 싶은 얘기를 모두 다 쓸 거예요. 그건 누굴 죽이는 것과 같은 힘이 있대요. 선생님이 인정머리 없는 늙은 유태인이 아니고 심장에 제자리에 붙어 있는 진짜 유태인이라면, 좋은 일 한번 해주세요. 로자 아줌마를 고통스런 생에서 구해주세요. 생이란 것은 아줌마를 엉덩이로 걷어차버렸어요. 그놈의 알지도 못하는 하느님 아버지란 작자 때문이에요. 그 작자는 어찌나 잘 숨어 있는지 낯짝도 안 보여요. 그 낯짝을 재현시키는 것조차도 안 된대요. 붙잡히지 않으려고 마피아들을 풀어서 막잖아요. ...로자 아줌마를 도와주지 않는 더럽고 멍청한 의사들은 비난받아야 해요. 그건 범죄라구요..." (265쪽)

어린 모모의 말이지만 틀린 것이 없다.

아줌마에겐 아무도 없는 만큼 자기 살이라도 붙어 있어야 했다. 주변에 사랑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사람들은 뚱보가 된다. (95쪽)

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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