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리아드
카테고리 정치/사회 > 대학보충교재
지은이 마릴린 로빈슨 (한국방송통신대학교,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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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는 크게 성공한 책인가보다.  

아버지 존 에임스 목사는 자신이 심장병으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 6살 아들에게 편지를 쓴다. 그의 나이는 일흔을 넘겼다. 아내와는 대충 짐작컨대 20살 이상 차이가 날 것이다. 그는 아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읽어주기를 바라며 편지를 쓴다. 노예해방을 위해서 남북전쟁에 북부군으로까지 참전했던 목사 할아버지, 전쟁과 살인에 반대해 할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목사 아버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이어 목사가 된 주인공, 존 에임스 목사, 3대에 걸친 가족사를 편지에 담는다.

사 대가 살아 온 길리아드 는 성경에 등장하는 어느 이상적인 마을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다. 노예해방운동을 지지하는 백인들이 중부로 옮겨와 마을을 세웠다. 남부군과 북부군 사이에서 극단의 정치적 갈등을 겪으며 부대꼈고, 오랜 시간이 흘러 동의 보수주의와 서부의 자유주의적 분위기 사이에서 부대꼈다.

존 에임스 목사는 관대하고 자비로운 종교인이다. 나는 종교를 가진 적이 없다. 대부분의 종교가 갖는 현실적인 문제들에 매우 비판적이지만 여러 종교들의 미학적 아름다움과 신학의 세계관도 인정한다. 속세의 종교가 말하는 형태들과는 전혀 무관한 어떤 초월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러니까 이 책 길리아드 는, 나 같은 사람에게, 신학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훌륭한 사람들이다. 존 에임스 목사 역시 신도들이 무교론자들을 비난할 때 '그에게는 신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현명함을 갖춘 사람이다. 세상에서는 온갖 추잡한 일들과 얽혀 있는 종교이지만, 종교의 가장 근본의 세계, 혹은 끝까지 밀고 갈 때 발견할 수 있는 철학으로서의 신학.

물론 글쓰기에는 그 이상의 뭔가가 있었지. 내게 글쓰기는 언제나 기도처럼 느껴졌고, 기도문을 쓰지 않을 때도 기도하는 것 같았어. 누군가와 같이 있는 느낌 있잖니. 난 지금 너와 함께 있는 기분을 느낀다. 네가 지금은 어리고, 어른이 되었을 때 이런 편지에 관심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이런 느낌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만. 어쩌면 이런저런 이유로 네가 이 편지들을 못 볼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네가 이 글을 읽을 때까지 겪은 슬픔이 안타깝고, 또 네가 좋은 일들을 만끽할 것을 기대하며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다시 말해 나는 너를 위해 기도한다. 거기에는 친밀감이 있지. 그건 사실이란다. (32쪽)

그렇기 때문에 좀 어려운 부분도 많았고 성경 구절이 자주 인용되느라 중간중간 이입되려는 마음이 사그라들곤 했다. 게다가 종교적인 분위기는, 매우 드물게도, 한국과 미국이 뚜렷한 차이를 보여줄 것 같다. 물론 한국 기독교 특히 장로교회들은 미국에서 건너온 것이 많고 미국식 조직이나 제도와 유사한 점이 많다고 하지만 사회 전반의 분위기를 놓고 보면 판이하게 다르다. 아마 한국은 세계적으로도 좀 특별할 것이다. 프랑스나 독일 같은 나라들이 오히려 미국보다 종교적인 의식, 사고방식, 문화가 덜 강력하게 자리잡고 있을 것 같다. 미국은 대도시 지역을 제외한 여러 지역에서는 아직도 종교 조직이 강력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윤리적 기준이 아직도 종교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하는 것 같다.

그래서 좀 재미없게 읽었지만, 종교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사람이나 혹은 종교적 세계관을 많이 따르는 이들에게는 아주 훌륭한 책이 될 것이다. 나중에 시간 나면 찬찬히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강력하다.  

주인공 존 에임스 목사의 마음이 십분 이해되었다. 여러 말보다, 심지어 아버지 자신의 약력을 적는 것보다, 현재의 삶 속에서 여전히 풀리지 않는 고민과 그에 얽힌 과거의 경험들을 두서없이 쓴 편지를 읽을 때 아들은 아버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다 좋지만, 내가 사랑하는 것은 네 존재야. 내게 있어 '존재'란 상상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비범한 것이란다. 이제 난 불멸하는 체해야겠다. 한순간, 한 눈의 반짝임 속에서.

한 눈의 반짝임. 더할 나위 없이 멋진 표현이구나. 가끔 그것이 삶에서 최고의 것이란 생각이 든다. 무엇의 매력에 빠지거나 유머를 본 사람의 반짝임... '눈빛은 마음을 기쁘게 한다'고 했지. 그건 사실이란다.

네가 이 글을 읽는 동안 난 불멸이 되는 거고, 어쩌면 젊을 때의 힘 속에서 사랑하는 이들을 곁에 두고, 생존할 때보다 더 살아 있게 되지. 너는 조바심 내고 정신이 몽롱한 노인의 꿈들을 읽고, 나는 어떤 꿈보다도 근사한 빛 속에서 살지. 하지만 널 기다리지는 않겠다. 네가 물리적인 삶을 오래 누리기를, 네가 물리적인 세상을 사랑하기를 바라니까. 내가 이 세상을 몹시 그리워하지 않으리라고는 상상할 수가 없구나. (73쪽)

최근에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사실 존재에 대해 감탄이 넘쳐서 적절히 즐길 수 없을 정도지. 오늘 아침 교회로 가는 길에 전쟁 기념비 부근에 줄지어 선 참나무들을 지나면서, 한두 해 전의 가을 아침 거기서 도토리가 우수수 떨어지던 일을 떠올렸지. 나뭇잎 속에 도리깨질이라도 한 듯, 내 머리를 스치며 길에 와르르 떨어졌어. 물론 사방이 어두웠지. 달이 떠 있던 기억이 나는구나. 아주 맑은 밤이었는지 아침이었는지 모르지만 아주 고요했지. 그러더니 나무 사이에서 폭풍우 같고, 산통 같은 힘찬 것이 쏟아졌지. 난 약간 비켜서서 '내게 아직도 새로운 게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단다. 초원 지대에서 평생을 살아온 내게 줄지어 선 참나무들이 여전히 새로울 수 있구나. (77쪽)

어느 저녁 보턴과 성경 본문을 살피고 토론을 마치고 둘이 현관 밖으로 나가자, 반딧불이 수천 마리가 떼를 지어 날고 있었지. 평생 본 것보다도 많은 것 같았어. 풀 위로 날아올라 공중에서 빛이 꺼졌지. 우린 어두운 계단에 앉아서 한참 동안 말없이 반딧불이를 바라보았어. 마침내 보턴이 입을 열었지. "불꽃이 위로 날 듯이 인간은 고통을 안고 태어나지." 정말이지 땅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은 밤이었지.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 오래된 불은 스스로 검은 껍질을 만들어 그 안에 안주하지. 이 지구가 그렇듯이. 개인에게도 같은 비유가 적용될 게다. 길리아드도 그렇겠지. 문명도 마찬가지고. 조금만 자극하면 불꽃이 날아가지. 그 말이 반딧불이를 축복했는지, 반딧불이가 그 말을 축복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후로 둘 다 마음에 들었어. (95쪽)

... 나는 저마다 서로에게 비밀이며, 저마다 다른 언어가 있다고 믿는다. 미적 가치관도, 법도도 각각 다르지. 각자는 앞서 있었던 무수한 문명의 폐허 위에 세워진 작은 문명이지만, 무엇이 아름다움이고 무엇을 받아들일지에 대해 각기 다른 관점이 있지. 일반적으로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우리는 그것에 맞춰 살려고 발버둥친다는 점을 덧붙여야겠구나. 주위 사람들이 같은 관습과 풍습, 인식, 예의범절, 건전성을 이어받았기에 우린 뜻밖에 비슷함도 갖는단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 침범할 수 없고 뒤집을 수 없는, 넓은 공간이 있기에 공존할 수 있지. (243쪽)


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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