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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어렸을 때부터 책을 읽으면서, 독서에 관한 내 관념은 몇 차례나 바뀌었다. 젊었을 때는 그저 지식을 내 것으로 만드는 수단으로 책을 읽었다. 그때 책은 아파트 평수를 넓혀 가는 것과 같이, 내 개인적인 재산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다른 사람과 이해와 사랑을 나누는 방법으로 책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지식을 소유하는 게 아니라, 책을 통해 타인과 관계 맺어 가게 된 것이다. 무엇엔가 중독된다는 말은 곧 외로움으로 통하지만, 책에 중독된다고 해서 외로워지지는 않는다. 104~105쪽
선물받은 책. 선물한 이가 책 곳곳에 밑줄 그어 놓았다. 파랑색이고 아마 플러스펜. 반갑고 고마웠다. 책을 주고 받는 일. 자신에게 소중한 책을 그대로 선물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선물하지 않고 새로 사주곤 했다. 접어놓은 흔적이 남은 모퉁이, 연필로 남긴 표시, 밑줄, 괄호와 큰 따옴표. 과장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내겐 뭉클한 타인의 흔적이다.
5) 공부는 읽기.생각하기.쓰기라는 삼박자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삼박자를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게 바로 독후감이지요. 우리 옛말에 공부해서 남 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처음에 독후감을 쓸 때는 뭘 쓸지 막막하지만, 계속해서 책을 읽다 보면 지금까지 읽고 생각했던 것들이 모두 자기 내부에 녹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258쪽
어제 프레시안 북스에 들어갔다가 장정일씨의 서평을 발견했다. 독서일기 최근작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에서 앞으로 독서일기를 단행본으로 내지 않고 온라인에 올릴 것 같다더니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책만 온전히 다루는 매체가 온.오프라인 통틀어 매우 드문 현실을 감안한다면 프레시안 북스를 선택한 것은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다. 한 주제로 10권 가까이 되는 책을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쓰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그게 '독서일기'라니. 보통 수준 이상의 성실함, 그가 진심으로 책을 좋아한다는 것, 읽고 쓰는 일이 삶 자체에 배어 있음을 증명한다. 우리는 그가 읽고 쓰면서 무엇을 고민했었는지 목격했다. 또한 동시대의 굵직한 사건들에 맞서 그는 어떤 책을 읽었는지, 자신의 독서를 현실과 어떻게 관계 맺었는지도 지켜보았다. 책, 현실, 독자 - 세 요소가 관계 맺고 영향을 주고 받는 모습이 그 책들에 담겨 있었다. 우리의 동시대에 이만큼 흥미로운 텍스트가 얼마나 되겠는가. '장정일의 독서일기'라는 제목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였던 것 같다.
레몽 장, 책 읽어주는 여자, 세계사, 1990
야마다 쇼지, 가네코 후미코, 산처럼, 2003
엘리어트 레이턴, 국경없는 의사회 : 인도주의의 꽃, 우물이있는집, 2003
이우환, 시간의 여울, 디자인하우스, 2002
유용주, 마린을 찾아서, 한겨레신문사, 2001
산도르 마라이, 열정, 솔, 2001
모옌, 탄샹싱, 중앙M&B, 2003
야마다 쇼지, 가네코 후미코, 산처럼, 2003
엘리어트 레이턴, 국경없는 의사회 : 인도주의의 꽃, 우물이있는집, 2003
이우환, 시간의 여울, 디자인하우스, 2002
유용주, 마린을 찾아서, 한겨레신문사, 2001
산도르 마라이, 열정, 솔, 2001
모옌, 탄샹싱, 중앙M&B, 2003
적지 않은 책에 관심이 생겼다. 때가 되면 읽을 일이 있겠지. 경험상 이렇게 적고 나면 기억에 꽤 오래 남는다. 목록을 손에 쥐고 책을 찾는 일은 정작 드물다. 그보다는 서점이나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읽을 책을 찾고 있을 때 눈에 익은 제목이 점점 늘어나게 된다. 내겐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 같은 코너가 없어도 된다. 누군가가 쓴 독후감과 서평을 통한 것이므로 가장 믿음직한 추천 목록이 머릿속에 이미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장정일과 정혜윤, 스타일이 확연히 다르다. 나는 두 사람의 글쓰기를 모두 좋아한다. 모델로 삼고 싶은 쪽을 고르라면 정혜윤씨 이지만 실제로 내 글은 장정일씨 쪽에 가까운 것 같다. 두 사람을 포함한 여러 독서가들과 그들의 글 덕택에 나의 읽고 쓰기도 힘을 얻는다. 으쌰으쌰, 부지런히 읽고 쓰자. 성실함만이 나의 무기.
아래는 인상적인 구절들.
(삼국지에 담긴) '적과 싸우고, 패해서 무릎을 꿇고, 은전을 받은 뒤에 새로운 주군을 위해 생명을 바쳐 싸운다'라는, 도저히 친숙해지지 않는 무시무시한 남성적 서사가 꿈속에까지 저를 괴롭혔습니다. 45쪽
'역사 기술이 애초부터 객관적일 수 없으며 주관투성이라면, 역사가는 무엇을 주장해도 상관없느냐?'라는 질문 앞에, 저자는 "객관적인 역사가"란 신화에 지나지 않지만, "합리적인 역사가"는 존재한다고 말한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 둘을 구분하지 못할 뿐 아니라, 둘 사이를 동일시하기 때문에 벌어진다. 저자에 의하면 역사도 하나의 장르이다. 추리소설이나 요리 책이 추리소설이고 요리 책인 것은, 내용만 아니라 자신을 기술하는 "장르의 규칙" 때문이다. 역사는 확인 가능한 "증거"와 편의적으로 편집되지 않은 "자료"를 제시해야 한다. 역사 장르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증거와 자료의 제시'라는 관행은 꽤 안정적으로 남아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합리적인 역사가가 된다는 것과 역사를 쓴다는 것은 역사라는 장르의 규칙을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164~165쪽
201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