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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인문 > 철학 > 서양철학일반 > 프랑스철학
지은이 자크 랑시에르 (궁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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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책. 한국어 번역본이 나오는 데 22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다. 불어를 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서 정말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렇게 재밌고 충격적인 책을 너무 늦게 읽는다.

2년 전 이음아트에서 샀던 책이다. 한 사장님이 계실 때였다. 공부방 동료들과 함께 들렀는데 마침 MBC 라디오 작가가 오디오 인터뷰 중이었다. 염두에 두고 있던 이 책을 골라 판매대 앞으로 가자 마이크가 불쑥 튀어 나왔다. 주인장과 손님 사이의 대화를 담고 싶단다. 한 사장님이 책을 보고 아는 척을 하자 작가 분이 질문을 던졌다. "아는 책인가 보죠? (다음 대목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재밌는(혹은 인기있는) 책인가봐요?" 이어진 한 사장님의 대답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렇다기보다는, 중요한 책이죠." 나는 '중요하다'라는 형용사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 단어에 담긴 자신감과 확신은 충격적이었다. 도대체 어떤 책이기에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누가 나에게 '중요한' 책 한 권을 물어본다면? 지금으로선 <공산당 선언> 외에는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게 없다. 한 권의 책을 두고 '중요하다'고 말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좋은 책은 누구에게나 많지만 중요한 책은 매우 드물다.

2년이 지나고 마침내 읽었다. 읽는 동안 내내 감동했고, 설레었으며, 부푸는 가슴을 어찌할 줄 몰랐다. 책 곳곳에 밑줄을 그었고 다 읽은 뒤에는 '찾아보기'를 참고하며 뒤적였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아주 강하게 들었다. '친구들과 함께 읽고 싶다'. 내가 이곳에 있지만 않았다면 당장 그렇게 할 것이다. 일단은 만나는 친구들마다 감동을 전달하려고 애쓸 것이다. 그런데 혼자 한번 읽은 것 가지고는 조리있게 말하질 못하겠으니 발을 구르며 답답해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같이 읽어보자, 줄긋고 요약해가며 읽어보자'고 설득할 것이다.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친구들에게 추천하는 일은 지금부터라도 시작할 생각이다.

앞에서 밝힌 것처럼 이 상태로는 내용을 요약.정리하는 게 버겁다. 한번 더 읽어봐야 논리적인 흐름을 대충이나마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내 가슴을 부풀게 한 많은 구절들 중 일부를 발췌하여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하자. 이 발췌문을 읽는 것만으로도 가슴 설렐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가 모르는 것을 가르쳤다"는 하나의 진리다. 그것은 존재했고, 되풀이될 수 있는 사실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이 사실의 근거는 지금 당장은 하나의 의견이다. 그것은 어쩌면 항상 의견일 것이다. 그러나 이 의견을 가지고 우리는 진리 주위를, 사실에서 사실로, 관계에서 관계로, 문장에서 문장으로 돈다. 중요한 것은 거짓말하지 않기, 눈을 감고 있었으면서도 보았다고 말하지 않기, 본 것과 다른 것을 이야기하지 않기, 그저 이름만 붙여놓고는 그것을 설명했다고 믿지 않기이다. 118쪽

그렇다고 해도 생각은 말해져야 하고, 작품 속에 표명되어야 하며, 다른 생각하는 존재들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생각은 자의적인 의미작용을 하는 언어를 통해 그렇게 해야 한다. 거기에서 소통의 장애물을 볼 필요는 없다. 게으른 사람들만이 이러한 자의성에 대한 관념을 두려워하고 거기에서 이성의 무덤을 본다. 정반대로, 신이 준 법령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언어의 언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지능은 그의 모든 기술을 이용하여 자신을 이해시키고, 이웃의 지능이 그에게 (말을 통해) 의미하고자 한 바를 이해한다. 생각은 진리로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진실함으로 표현된다. 생각은 나눠지고, 이야기되고, 다른 이에게 번역되며, 그것을 들은 다른 이는 그것으로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든다. 이 다른 번역은 다음의 유일한 조건 속에서 이루어진다. 소통하려는 의지. 다른 이가 생각한 것, 그가 해주는 이야기 말고는 어떤 보증도 없는 것, 어떤 보편적인 사전도 그 이야기에서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지 말해주지 않는 그런 생각을 짐작하려는 의지. 의지는 의지를 짐작한다. 이 공통의 노력 속에서 지능의 시중을 받는 의지로서의 인간이라는 정의는 그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124쪽)  이해한다는 말을 그것의 참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사물들의 베일을 걷어내는 터무니없는 힘이 아니라, 한 화자를 다른 화자와 직면하게 하는 번역의 역량으로 말이다.(126쪽)  (번역은) 어떤 이성적 동물이 나에게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모든 지표에 매달려 짐작하려는 의지다.(127쪽)

느낌과 표현 사이의 이 틈, 감동을 표현하는 무언의 언어활동과 언어의 자의성 사이의 이 틈에 대해 작업한 사람들에게 배워야 한다. 영혼과 영혼 자체의 말없는 대화를 듣게 만들려고 시도했던 자들, 정신들의 비슷함에 대한 내기에 그들이 하는 말의 모든 판돈을 걸었던 자들에게 배워야 한다. 135쪽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 이중의 발걸음을 내딛는 한에서 예술가다. 예술가는 직업인이 되는데 만족하지 않고 모든 일을 표현 수단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그는 느끼는 데 만족하지 않고 나눌 방도를 찾는다. 설명자가 불평등을 필요로 하듯, 예술가는 평등을 필요로 한다. 139쪽

덧붙여 말하자면 이 책은 '번역본'으로서도 훌륭하다. 번역 자체에 공들였다는 점을 한눈에 알 수 있고, 번역자 양창렬씨는 랑시에르의 저작을 꾸준히 번역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번역자의 주석은 나 같은 사람에게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책 말미에 달린 '옮긴이의 말'은 저작의 출판 전후 프랑스 사회에서 일어난 논쟁을 요약해서 소개하고 있으며, 관련 자료의 출처를 알려 준다. 철학자 랑시에르의 주요 저작 역시 잘 요약해서 소개해주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또 한번 감동했다.

2011.3.5.

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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