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린책산책버린책.2장정일의독서일기
카테고리 인문 > 인문학일반
지은이 장정일 (마티,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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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새 독서일기다. 서점에 들렀다 우연히 발견했고 바로 구입했다. 지금까지 본 그의 독서일기 중 책 만듦새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표지와 프로필 사진에서 엿볼 수 있는 저자의 작업 공간은, 나를 황홀하게 했다. 커다란 스피커와 끝없이 쌓여 있는 책들, 책들. 책 뒤표지에 인쇄된 글은 또 어떤가. 책 어디에도 같은 글을 찾아볼 수 없다. 이 글은, 스스로를 독서가라 소심하게 이름 붙이며 읽고 쓰기를 즐기는 모든 이들을 행복하게 만들 만한 글이다. 제목 같아 보이는 맨 위의 문장은 이렇다. "책을 읽고 그것에 대해 쓰는 것은, 그 안에 쾌락이 있기 때문이다."
 
가만. 나는 왜 읽은 만큼 시간을 들여가며 독후감(서평이라 부르기엔 그만큼 성실하지 못한)을 쓰고 있을까. 시작은 스스로와 한 약속 때문이었고 늘어가는 글의 수만큼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지만, 쓰기 위해 자리에 앉아 하얀 화면을 바라볼 때면 매번 생각했다. 누가 많이 보는 것도 아니고 대학생들 과제 제출할 때에나 방문자 수가 반짝 늘고 마는 블로그에 굳이. 한 2년 쯤 지나, 서평 수가 250편 가까이 될 때 스스로 납득할 만한 해답을 하나 겨우 발견했다. '이게, 재미가 있긴 있구나.' 물론 다 읽고 쌓여 있는 책들을 볼 때마다 해야 할일을 까닭 없이 미루고 있는 기분이고, 지금도 하얀 화면을 앞에 두면 막막하다. 어찌어찌해서 일단 쓴다. 일단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러기만 하면 시간이 휙휙 지나간다. 신이 날 때도 있고 마음에 안 들어 짜증에 휘감길 때도 있다. 그러면서 쓰고, 고치고, 올리고, 읽고, 또 읽는다.
 
이번 책은 1권과 달리 문학 서평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전체 분량의 1/4 정도. 이런 변화의 이유를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독서일기를 내기 시작한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저자를 지배한 가장 강력한 독서론은 '독서는 극히 개인적인 쾌락'이라는 점이었다. 2004년 저자는 '시민은 책을 읽는 사람이고,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단순히 무지한 게 아니라, 아예 나쁜 시민이다'라고 쓰게 된다. 그리고 몇 년을 보냈다. 후자의 독서론은 지금도 포기한 게 아니어서 이번 책에서도 저자는 '사회적 독서'를 실천해 왔다고 말한다. 다만, 이번 책에서 느낄 수 있는 약간의 문학 냄새를 두고 "새로운 독서론으로 더 나아가기 전에, 앞서 살짝 비췄던 내 마음 속의 번민과 좀 더 부대끼고 싶"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뜻밖이었다. 아마 내가 그의 초기 독서일기를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뜻밖이었으나 실망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환영이다.
 

소설가 황석영의 신작 장편소설 <심청>을 읽고 쓴 서평은 압권이다. 저자는 근거 없이 극단의 찬사를 늘어놓을 뿐인 해설을 진심으로 비난하고, 분노와 저주의 말을 퍼붓는다. "비평은 객관성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 작품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를 밝히는 것과 동시에, 그 작품이 말하고자 했으나 말하지 못했던 것까지 함께 밝혀야 한다. 전자가 공감이라면 후자는 비판이다. 이런 균형과 각오가 없는 비평은 제 정신을 가지고 쓴 비평이 아니다."(387쪽) '제 정신을 가지고 쓴 비평'이 아니란 소리다. 시원스럽게 해설을 반박하면서 자신의 비평 역시 남기고 있다. 작품을 읽어보지 않았으니 내가 할 말은 없지만, 해설자 ㄹㅂㅅ 교수 씨는 아무래도 고운 인상을 남기 힘들겠다.
 
그밖에도 곳곳이 인상적이다. 대학 상업화에 대한 세 권의 책을 읽고 비교하여 쓴 서평에서 "부실한 르뽀가 그렇듯이 <대학 주식회사>의 지은이도 미국 대학의 기업화를 현상적으로만 파악하고자 할 뿐, 정치적이거나 이념적 분석을 극구 피했기 때문"(77쪽)이라고 지적하는 대목, "세계문학전집이란, 그 자체로 문학을 구성하는 일종의 환상이다. 말하자면 문학장에서 기독교인들의 천국과 같은 게 세계문학전집인 것"(276쪽)이라는 비유, 참고문헌마저 성실하게 작성하지 못한 책을 두고 에둘러 비판하는 부분 : "지식인이 겸손하면 좋겠지만, 지식인에게 겸손을 요구하는 것은 이를테면 금욕이나 채식처럼 어렵다. 돈 많은 사람들이나 미남미녀들은, 어디 가서 '체'할 필요가 없다. 돈 자랑을 하지 않아도, 그가 무엇을 먹고, 입으며, 어디서 자는지를 보면 부자인줄 안다. (...)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식은 '체'하거나 자랑하지 않으면, 도대체 뭘 배우고 뭘 아는지 알 수 없다. 머릿속은 안 보이기 때문이다. 아니꼽지만 이것에 '체'하고 자랑하는 지식인을 참아야 할 이유다. 그런데 이 책의 지은이는 워낙 '맨탕'이라 그마저도 할 게 없었나보다."(359쪽)
 
다음 독서일기는 더 기대된다. 본문 중 오자가 간혹 눈에 띄었지만 책이 워낙 예뻐 봐줄 만했다. 참, 전체 서평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글은 맨 처음 '모두 알고 있는 것으로 다른 것을 만드는 방법'(<작가가 작가에게>)이었다. 이 글과 후기를 읽으면서 성실하고 솔직한 서평가이기 전에 그가 시인이었고 지금은 소설가라는 사실을 환기하게 되었다. 요즘 한겨레 분당센터에서 강의를 하는 것 같던데, 굳이 가서 들을 생각은 없다. 글로 충분하다. 

출판사나 출판사와 연계된 매체가 서평가의 밥줄을 죄고 있다면, 해결책은 무엇일까? 가장 좋은 방법은 출판사와 매체로부터 자유로운 다른 장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걸 하자고 나설 서평자를 찾기란 쉽지 않다. 대신 오웰은 몇 가지 해결책은 든다. 하나, 서평가들이 서로 찬사를 자제할 것. 그렇지 않으면 끝없는 수사의 사다리로 내몰리게 되어, 마지막에는 아무 쓰레기에나 대고 광적인 찬사를 터뜨리게 된다. 둘, 잡지는 많은 소설을 서평 대상으로 삼으려 하지 말고, 1년에 12권 정도만 다룰 것. 그러면 선정 과정에서부터 옥석이 가려진다. 셋, 출판사나 매체에 오염된 직업 서평가보다 차라리 아마추어 서평가를 쓸 것. 오웰의 해법은 이렇듯 순진 소박하지만, 이런 제언조차 우리나라 문학계나 서평가에게는 버겁기 짝이 없다. 230쪽

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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