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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지난 일이 년 사이 번역자 이한중씨와 한겨레출판사가 그의 저작들을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작년(혹은 재작년)에 최초 번역된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제1회 <2011 디자인이 좋은 책> 우수상을 받았고, 대중적으로도 적지 않은 인기를 얻었다(나는 눈치 보여서 아직 읽지 못했다). 에세이 선집 <나는 왜 쓰는가>는 나오자마자 사서 읽었다. 책 만듦새는 흡족했으나 선집이라는 점에서 아쉬움도 있었다.
오웰은 1938년 스페인 내전을 다룬 르포르타쥬 <카탈로니아 찬가>를 썼고 바로 다음해 <숨쉬러 나가다>를 썼다. 다음에 나온 작품들이 오웰의 대표작 <동물농장>(1945)과 <1984>(1948)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그가 참 부지런한 작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부지런하게 만들었을까.
하나씩 하나씩 그의 작품을 읽어 가면서 생기는 묘한 감정이 있다. 죽은 지 오래 된 먼 나라의 작가에 대해서 말이다. 그걸 친근함이라고 불러야 할지, 우정이라고 해야 할지, 혹은 애정이라고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다. 처음 읽은 작품 <카탈로니아 찬가>가 소설이 아닌 르포르타쥬였다는 사실이 준 감동과 존경심에서 시작되었던 것 같다. <나는 왜 쓰는가>를 읽으면서 작가이자 언론인으로서 보여준 부지런함과 책임감이 진실이라고 생각했고 그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이번 책 <숨쉬러 나가다>는, 내가 처음으로 읽는 그의 소설이다.
작품의 주인공은 중년이 된 뚱보 보험영업사원이다.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나고 자라 1차 대전에 참전했으며 1930년대 중반, 전쟁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런던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다. 런던 교외의 평범한 주택에 매사 돈 걱정에 잔소리꾼인 평범한 아내와 두 아이가 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약간의 용돈이 생겼다. 사내는 이 돈을 어디에 쓸까 궁리하다 20년 전 떠나온 고향을 찾아가보기로 결심한다. 사실 평범한 중년 뚱보 직장인이 아니라 수다쟁이 중년 뚱보 직장인인 주인공의 옛 추억담이 소설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다. 어린 시절의 시골 생활, 작은 곡물 가게를 경영하며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했던 아버지, 십대 후반의 나이에 겪은 연애. 스스로 '감상적'인 것은 어쩔 수 없다고 고백하면서도 수다쟁이 아저씨는 날카롭게 재치 넘치게 과거를 추억한다. 대형 상업자본이 시골에 들어서기 전이었고, 템즈강에선 언제든 낚시를 할 수 있었으며, 마을 밖에 펼쳐진 숲과 들판의 풍경이 그려진다.
음식 장만하는 어머니는 몸동작 하나하나가 놀랍도록 정교하고 확실했다. 어머니 손에 들린 계란 젓개나 고기 저미개나 반죽 밀대는 목적을 정확히 수행했다. 요리하는 어머니를 보면, 어머니가 자신이 속하는 세상, 즉 자신이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것들 속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74쪽
(...) 지금도 그 느낌이 생생하다. 어느 겨울날, 가만히 누워 있기 좋을 만큼의 온기가 있다. 누운 자세로 배 위에 <첨스>를 펼쳐들고 있다. 생쥐 한 마리가 곡식 자루 옆구리 위를 태엽 달린 장난감처럼 도로롱 달리다가 갑자기 딱 멈추더니 그 조그만 흑옥 구슬 같은 눈으로 날 뚫어져라 바라본다. 나는 열두 살이지만 불굴의 도노반이기도 하다. 아마존 강을 2000마일 거슬러 올라간 나는 막 텐트를 쳤고, 야전침대 바로 밑에 둔 양철 상자 안에는 100년에 한 번 꽃을 피운다는 신비로운 난초의 뿌리가 안전하게 들어있다. 사방을 둘러싼 밀림에서는 호피-호피 인디언이 전쟁을 알리는 북을 울리고 있다. 나는 생쥐를 바라보고 생쥐는 나를 바라본다. 먼지와 세인포인과 서늘한 회반죽의 냄새가 나고, 나는 아마존에 가 있다. 더없는 즐거움, 환희 그 자체다. 133쪽
(...) 지금도 그 느낌이 생생하다. 어느 겨울날, 가만히 누워 있기 좋을 만큼의 온기가 있다. 누운 자세로 배 위에 <첨스>를 펼쳐들고 있다. 생쥐 한 마리가 곡식 자루 옆구리 위를 태엽 달린 장난감처럼 도로롱 달리다가 갑자기 딱 멈추더니 그 조그만 흑옥 구슬 같은 눈으로 날 뚫어져라 바라본다. 나는 열두 살이지만 불굴의 도노반이기도 하다. 아마존 강을 2000마일 거슬러 올라간 나는 막 텐트를 쳤고, 야전침대 바로 밑에 둔 양철 상자 안에는 100년에 한 번 꽃을 피운다는 신비로운 난초의 뿌리가 안전하게 들어있다. 사방을 둘러싼 밀림에서는 호피-호피 인디언이 전쟁을 알리는 북을 울리고 있다. 나는 생쥐를 바라보고 생쥐는 나를 바라본다. 먼지와 세인포인과 서늘한 회반죽의 냄새가 나고, 나는 아마존에 가 있다. 더없는 즐거움, 환희 그 자체다. 133쪽
그게 뭘까? 정말이지 그들은 미래를 공포스러운 무엇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시절의 삶이 지금보다 수월했다는 건 아니다. 실은 그때가 더 힘들었다. 사람들은 대체로 일을 더 많이 했고, 덜 편리하게 살았고, 더 고통스럽게 죽었다. (...) 그런데도 그 시절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바로 안정됐다는 느낌이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그들은 그렇게 느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계속 이어진다는 느낌이었다. (...) 그건 다름 아닌 안정된 시기, 문명이 코끼리처럼 네 다리로 서 있는 듯한 시기, 그래서 내세 같은 건 아무래도 그만인 시절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이 아끼는 것들이 계속해서 이어진다면 죽는 게 별로 억울하지 않다. (...) 그들은 자신이 서 있는 기반 자체가 흔들리는 느낌을 모르고 살았다. 156~157쪽
그는 마침내 고향에 도착한다. 고작 20여 년이 지났을 뿐이지만, 한국으로 치면 1960년대와 1980년대 농촌 풍경을 비교해보는 것과 비슷하다. 그가 고향에서 무엇을 발견했겠는가? 작은 마을은 거대한 공업도시로 바뀌었고, 낚시를 즐기던 강에는 오물이 떠다니며, 혼자만의 아지트였던 못은 이미 사라져 버렸다. 이곳 고향 하늘에도 폭격기는 날아다닌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속 쓰린 감상주의자가 되는데, 아마도 그 순간 시대적 변화의 한복판에 서서 번뜩이는 눈을 가지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조금은 어색한, 그래서 작가의 존재가 강하게 느껴지는 대목.
나는 잠시 그대로 울타리문에 기대 있었다. 혼자였다. 완전히 나 혼자였다. 밀밭을 바라보았다. 밀밭도 나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나는 느꼈다. 그런 느낌을 이해하실지 모르겠다.
내가 느낀 건, 요즘은 워낙 부자연스러워서 말로 하면 바보스럽게 느껴지는 어떤 것이었다. 나는 '행복'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건 영원히 살 수는 없지만 꼭 그럴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첫봄이 막 찾아왔기 때문일 뿐이라고 해도 좋다. 계절이 생식호르몬에 끼치는 영향 때문이니 뭐니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이 있었다. 묘하게도 인생이 살 만한 것이라는 확신을 불현듯 심어준 것은 프림로즈나 생울타리 새순이 아니라 문 가까이 있던 모닥불의 불씨였다. 바람 한 점 없이 잔잔한 날 피운 모닥불이 어떻게 되는지 아실 것이다. 나무토막이 전부 허연 재로 변해도 본 모양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재 밑으로 선명하게 붉은 잉걸불이 보이는 모습 말이다. 그런 발간 잉걸은 살아 있는 그 무엇보다도 더 살아 있다는 느낌을 준다. 거기엔 무언가가, 응집된 힘이나 떨림 같은 게 있다. 딱 들어맞는 말이 떠오르진 않지만, 그 무엇은 우리가 정말 살아 있음을 알게 해준다. 그것은 그림에서 다른 모든 부분을 알아보게 해주는 어느 한 점과도 같은 것이다.
(...) 틀니를 다시 입에 끼워넣기 전에 슬쩍 보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은 '상관없다'는 것이었다. 틀니를 하는 처지여도 상관없다 싶었다. 나는 뚱뚱하다. 그렇다. 나는 마권업자의 실패한 동생처럼 보인다. 그렇다. 이제는 어떤 여자도 돈을 받지 않고서는 나와 자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모든 걸 나도 다 안다. 하지만 정말이지 다 상관없다. 여자도 필요 없고, 다시 젊어지고 싶은 마음도 없다. 정말로 살아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리고 프림로즈를, 생울타리 너머로 빨간 잉걸을 보고 서 있던 그 순간, 나는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떤 느낌, 평화로움 같은 것이었고, 그러면서 불꽃 같은 것이었다.
(...) 왜 사람들은 천치 같은 짓에 세월을 허비하기만 할까? 왜 슬슬 걸어다니며 사물을 그윽히 들여다보지 않는 것일까? (...) 물속에 사는 것들의 신비는 어떤가. 그것들을 낱낱이 다 살펴보자면 평생이 가도, 열 평생이 가도 연못 끝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내내 경이감 같은 것을, 내면의 묘한 불꽃 같은 것을 느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가질 만한 유일한 무엇일텐데, 우리는 그걸 원치 않는다. 233~235쪽
(...) 틀니를 다시 입에 끼워넣기 전에 슬쩍 보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은 '상관없다'는 것이었다. 틀니를 하는 처지여도 상관없다 싶었다. 나는 뚱뚱하다. 그렇다. 나는 마권업자의 실패한 동생처럼 보인다. 그렇다. 이제는 어떤 여자도 돈을 받지 않고서는 나와 자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모든 걸 나도 다 안다. 하지만 정말이지 다 상관없다. 여자도 필요 없고, 다시 젊어지고 싶은 마음도 없다. 정말로 살아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리고 프림로즈를, 생울타리 너머로 빨간 잉걸을 보고 서 있던 그 순간, 나는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떤 느낌, 평화로움 같은 것이었고, 그러면서 불꽃 같은 것이었다.
(...) 왜 사람들은 천치 같은 짓에 세월을 허비하기만 할까? 왜 슬슬 걸어다니며 사물을 그윽히 들여다보지 않는 것일까? (...) 물속에 사는 것들의 신비는 어떤가. 그것들을 낱낱이 다 살펴보자면 평생이 가도, 열 평생이 가도 연못 끝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내내 경이감 같은 것을, 내면의 묘한 불꽃 같은 것을 느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가질 만한 유일한 무엇일텐데, 우리는 그걸 원치 않는다. 233~235쪽
결국 그는 쓰린 발견만 부여안고 집으로 돌아온다. 누구도 전쟁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인문학적 지식이 풍부한 친구를 찾아가 보았지만 그에게서 실망만을 느낄 뿐이다. "인간이 정말 죽는 것은 두뇌 활동이 멈추는 때인지도 모른다. 새로운 관념을 받아들일 힘을 잃어버릴 때 말이다. 포티어스가 그렇다. 학식이 풍부하고 취향이 고상한 그이지만, 변화를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한다. 언제까지나 같은 말, 같은 생각만 되풀이할 뿐이다. (...) 정신적으로, 내면적으로 죽은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짧은 한 노선을 계속 왔다 갔다 할 뿐이고, 그러면서 점점 활력을 잃어간다. 마치 유령 같다."(229쪽) 저널리스트이기도 했던 작가의 태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다 써버린 용돈, 더 늘어난 뱃살, 부양해야 하는 가족, 폭격기, 전쟁, 아내의 잔소리 외엔 없다. 그는 다시 일을 해야 하고 대출금을 갚아야 하고 자동차를 굴려야 한다. 자기 같은 사람이 전쟁을 신경 쓴들 무얼 하겠냐고,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자문한다. 내 생각엔 그건 자문이라기보다 설득 같다. 이 수다쟁이 뚱보 아저씨는 며칠 동안의 여행을 보내며 비판하고 회의할 줄 아는 지성을 충분히 보여줬다. 그는 사실 정체를 숨겨 왔고, 소설의 말미에 가선 스스로를 설득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나는 동정의 마음을 담아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는다. 아마 그의 설득은 실패할 테지만, 그의 일상이 격변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전쟁은? 소설에서는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작가는 또 한 번의 전쟁을 목격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다 써버린 용돈, 더 늘어난 뱃살, 부양해야 하는 가족, 폭격기, 전쟁, 아내의 잔소리 외엔 없다. 그는 다시 일을 해야 하고 대출금을 갚아야 하고 자동차를 굴려야 한다. 자기 같은 사람이 전쟁을 신경 쓴들 무얼 하겠냐고,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자문한다. 내 생각엔 그건 자문이라기보다 설득 같다. 이 수다쟁이 뚱보 아저씨는 며칠 동안의 여행을 보내며 비판하고 회의할 줄 아는 지성을 충분히 보여줬다. 그는 사실 정체를 숨겨 왔고, 소설의 말미에 가선 스스로를 설득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나는 동정의 마음을 담아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는다. 아마 그의 설득은 실패할 테지만, 그의 일상이 격변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전쟁은? 소설에서는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작가는 또 한 번의 전쟁을 목격했다.
작가의 입김, 아니 그보다는 작가와 작품의 시공간적 배경이 같은 데에서 오는 역사의 입김이 워낙 강하다. 문학적으로는 조금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지만 작가를 좋아하는 입장에서는 충분히 즐거웠다. 저널리스트 오웰의 면모는 아마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서 톡톡히 드러날 것이다. 기대된다.
실상은 아이들이 전혀 시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작고 잔인한 동물일 뿐이다. 어떤 동물도 아이들의 4분의 1만큼도 이기적이지 않다는 점만 빼놓고 말이다. 어린 사내아이는 초원이니 숲이니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경치를 바라보는 법도 없고, 꽃 따위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맛이 좋다든가 하는 게 아닌 한, 식물들이 서로 어떻게 다른지도 알지 못한다. 무언가를 죽이는 것! 그게 소년이 도달하는 시심에 가깝다. 그런가 하면 어린아이에겐 무언가를 절실히 바라는 갈망의 힘이 있다(어른이 되면 불가능해지는 특유의 강렬함이다). 그리고 시간이 무한정 자기 앞에 펼쳐져 있으며 무얼 하든 영원히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있다. 10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