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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귀 소설의 모태라 할 수 있는 원작이다. 1897년에 발표되었다. 번역본은 1992년 초판 인쇄이고 2000년에 신판이 나왔다. 겉표지가 없는 채로 선물 받았다. 열린책들 특유의 견장정이다.
이 소설에서 흥미로웠던 점 두 가지는 두 개의 연도와 관련이 있다. 먼저 원작이 발표된 1897년. 대영제국이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때였다. 독일과 미국 등이 바짝 뒤따르고 있었지만 아직 영국의 해는 지지 않고 있었다. 이성, 과학, 합리성, 분석과 논리적 결론이 세상 모든 곳을 환히 비쳐줄 것이라고 믿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부르주아 핵가족에 고착된 성 역할은 아직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원작 소설 <드라큘라>는 19세기 말 영국의 자신감과 당당함을 조금의 의심 없이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비슷한 시기 영국에서 발표된 <프랑켄슈타인>(아직 읽어보지 않았다)과 대조점이 많을 것 같다.
그이(반 헬싱)는 철학자이며 형이상학자이네. 그리고 그 연배 중에서 가장 탁월한 과학자 중의 한 분이기도 하지. 내가 보기에는 무한히 열린 정신을 가진 분이기도 해. 게다가 신경은 강철 같고, 맑고 차가운 시냇물 같은 품성을 지녔으며, 불요불굴의 결단력과 자제력을 갖추고 있지. 또, 사나이다운 패기에서 우러나온 넉넉한 마음씨가 자비로운 관용의 정신으로 승화되어 있고, 뜨거운 심장에는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하고 신실한 마음이 넘쳐 흐르는 분이야. 209쪽
그는 내가 너무 외로움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했다. 그는 참 착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다. 세상에 비록 괴물들이 있긴 해도, 훌륭한 남자들이 많다는 것은 얼마나 마음 든든한가! 405쪽
여자의 본성에 무엇이 있길래, 여자들 앞에서 남자들은 이렇게 부드러워지는 걸까. 남자들이 자신들의 남성다움이 훼손된다는 느낌을 갖지 않고, 여자들 앞에서 마음껏 울기도 하고, 자신들의 연약하고 감정적인 마음을 드러내기도 할 수 있게 하는 여자의 본성은 무엇일까. 414쪽
영화나 문학 속에서 등장하는 흡혈귀 이미지에 익숙해진 나 같은 사람은 원작의 드라큘라 백작 역시 무서운 괴물로 여긴다. 실제로 작품 속 드라큘라 백작은 주인공의 친구를 물어 죽이고, 영국 전역을 지배하려는 잔인하고 사악한 존재다. 중반부까지 드라큘라의 꾀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주인공들에게 감정 이입하며 그들을 응원하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반 헬싱이라는, 위의 인용문대로 라면 성인에 가까운 한 인물이 등장하여 주위 사람들을 계몽시키고 드라큘라의 정체와 약점을 밝혀내자 상황은 급변한다. 그리고 어느 지점에선가 드라큘라 백작이 달라 보였다. 그가 번화한 도시에 갓 올라온 시골 촌놈 같아 보였다. 먼 동유럽('동양'이나 다를 바 없는)에서 온 촌놈이 세계 문명의 첨단인 영국 런던에서 한번 설쳐보려다 논리와 기록, 지식, 과학, 이성과 합리성, 부유한 부르주아지들의 우애(단결)에 부딪혀 결국 제거당하고 마는 이야기 같았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심지어 드라큘라 백작 파이팅! 이라고 외쳐주고 싶기도 했었다.
두번째 연도, 1992년. 번역본의 초판 인쇄년도다. 작품 곳곳에서 요즘 책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우리말 낱말이 쓰이고 있다. 1990년대 초반까지 이런 낱말들을 자주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보긴 어려울 것 같다. 그 당시 출판된 책 몇 권을 읽은 기억이 어렴풋하게 남아 있는데 같은 인상을 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번역자가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일 텐데, 참 흥미로운 낱말들이 많았다. 당장 생각나는 것만 꼽아도 '드레지다, 가풀막, 삽상하다, 초들다, 뱀뱀이, 음전하다, 반지빠르다, 재우치다, 중동무이, 여불비례' 등등. 하나하나 사전을 찾아가며 읽었다. 뜻풀이가 재밌어서 즐거울 정도였다.
새 낱말을 알아갈 때마다 안타까운 게 하나 있다. 우리는 보통명사를 너무 모른다. 위의 낱말 중 단적인 예로 '가풀막'이라는 낱말을 들 수 있다. '가풀-막 [명사] 가파르게 비탈진 곳.'이라는 뜻인데, 풀이를 보고 나면 평소 비슷한 뜻으로 사용하는 '비탈'이라는 낱말의 뜻이 궁금해질 것이다. 사전에 비탈은 '비탈 [명사] 산이나 언덕의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곳. ~이 가파르다.'이라고 한다. 비탈 중에서 특히 가파른 곳을 '가풀막'이라고 부르는 셈이다. 그밖에 우리 일상의 대화를 가만 듣다 보면(특히 전화 통화에서) 보통명사를 몰라 대화가 길어지거나 서로 의미 전달이 안 돼 답답한 경우가 꽤 많다.
예상보다 깔끔한 작품이어서 약간 놀랐다. 프랑켄슈타인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몇 년 전 친구가 정말 재미있는 작품이라고 추천해준 기억도 있다. 두 작품을 비교하며 읽고 쓴다면 좀 더 재밌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