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성의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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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W. G. 제발트 (창비,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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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디언 Sebaldian. 소설가 배수아의 추천사. 한 문단짜리 글이다. 아주 매력적으로 썼다. 제발트의 소설을 한 권이라도 읽고 반한 사람이라면 더 그럴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국내에 처음 소개된 대표작 <이민자들>에 이어 창비가 두 번째로 선보인 책이 <토성의 고리>다. <이민자들>이 그런 것처럼 다른 여느 소설에서는 거의 느낄 수 없는 정서가 깔려 있다. 서술 방식은 어떻고. 대화문을 따로 표시하지 않고, 한 개 문단이 보통 한 쪽을 넘으며, 내용을 뒷받침해주는 사진들이 실려 있고(<이민자들>의 역자후기에서 역자는 사진이 텍스트를 역사적 사실로 뒷받침한다는 보장은 없다며 이는 저자의 의도이기도 하다고 알려준다), 저자와 대부분의 사회적 배경(직업, 거주지, 시대)이 일치하는 1인칭 화자가 주인공인 것도 공통적이다. 
 
숱한 인물들이 등장하며 이야기를 끌고 나아가는 것도 그렇다. 옛 친구 마이클 파킨슨을 시작으로 플로베르 연구자 재닌 로잘린드 데이킨스, 작품 전체에 걸쳐 등장하는 17세기 의사이자 학자였던 토머스 브라운, 여행지에서 만난 정원사 윌리엄 헤이즐, 이웃 프레더릭 파라, 조지 윈덤 르 스트레인지 소령, 20세기 초 영국의 정치가이자 아일랜드 독립운동가.동성애자였던 로저 케이스먼트, 소설가 조셉 콘래드, 작가 앨저넌 스윈번, 주인공의 친구인 작가 마이클 햄버거, 친구인 교수 스탠리 케리, 작가 에드워드 피츠제럴드, 여행지에서 만난 애슈버리 가족, 예수 생존 당시의 예루살렘을 모형으로 재현하려 애쓰는 알렉 제럴드, 작가 샤또브리앙 자작 등이 등장한다. 오래 전에 죽은 이들, 주인공의 이웃과 친구들이다. 주인공은 영국 동부 지방을 도보로 여행하며 이들을 추억하고, 과거의 삶을 조사하고,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는다. 풍만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한 이는 드물다. 외롭게 살았다. 그들의 삶은 영국 동부 지방의 풍광과 정서에서 분리되지 않으며 그려진다.
 
또 하나 이 작품의 특징은 주인공의 박식함과 학자적 태도이다. 비단과 누에에서 19세기 중국사, 보스니아와 세르비아 간의 학살사, 여행지의 향토사, 여러 작가들의 전기()까지 작품은 주인공의 감상적인 독백보다 조사에 근거한 역사적 사실이 압도적으로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숱한 사실들(게다가 일부는 저자에 의해 창작.가공되었을지도 모를)에 지루할 법도 하건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슬프고 황량한 도보 여행에 공허감을 느끼며 동행하는 느낌이었다.
 
화려하거나 풍만한, 웃음이 넘치는 즐거움과 행복함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기가 힘들다. 애써 슬픔을 자극하고 굳이 비극을 삽입하려 하는 것도 못나 보인다. 이렇게, 아니 제발트의 소설은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고, 슬픔과 공허와 쓸쓸함과 황량함과... 이런 정서와 감정만이 일으킬 수 있는 위로 혹은 위안을 안겨준다. 카버의 소설 두 편을 생각나게 한다. 이런 위안과 위로.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책이다. 

(...) 연소는 우리가 만들어낸 모든 사물들의 내적 원리다. 낚시 바늘의 제작, 사기잔을 만드는 수공업,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제작, 이 모든 것들이 결국은 연소라는 동일한 과정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가 고안해낸 기계들은 우리의 신체나 우리의 동경처럼 서서히 작열하는 심장을 갖고 있다. 인간 문명 전체는 애당초부터 매시간 더 강렬해지는 불꽃일 뿐이었으며, 이 불꽃이 어느 정도까지 더 강렬해질 수 있을지, 그리고 언제 서서히 사그라질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장은 우리의 도시들이 빛을 발하고, 아직은 불이 번져간다. 199~200쪽

몇날 몇주 동안 성과도 없이 머리를 쥐어짜지만, 만일 누가 물어보기라도 하면 계속 글을 쓰는 것이 습관 때문인지, 과시욕 때문인지, 아니면 배운 게 그것밖에 없어서인지, 그도 아니면 삶에 대한 경탄이나 진리에 대한 사랑, 절망, 분노 때문인지 말을 할 수 없고, 글을 쓰면 점점 똑똑해지는 건지 아니면 더 미쳐가는 건지도 대답할 수 없다네. 213~214쪽

그래서 나는 물에 도착한다. 어떤 친구도 묻혀 있지 않고, 어떤 오솔길도 가로막지 않은 물에 말이다(And so, I get to the water: where no friends are buried nor pathways stopt up)라고 그는 말했다. 238~239쪽

하지만 너무도 자주, 너무도 갑작스럽게 압도하는 기억에서 나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오로지 글을 쓰는 길밖에 없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 기억들이 내 머릿속에 갇혀 있었더라면,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무거워져 결국 나는 그 짐을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기억들은 몇 달, 몇 년 동안 우리 마음 속에서 잠자면서 소리없이 점점 더 자라나다가, 결국 어떤 사소한 일을 계기로 되살아나 기묘한 방식으로 삶을 향한 우리의 눈을 멀게 한다. 그 때문에 나는 얼마나 자주 나의 기억들과 이 기억들을 글로 옮기는 작업을 굴욕적이고, 결국은 저주할 만한 일로 느끼곤 했던가! 하지만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이 될까? 우리는 가장 단순한 생각조차 정리하지 못할 것이고, 풍부한 감정을 지닌 심장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애착을 느끼지 못할 것이며, 우리의 존재는 무의미한 순간들의 끝없는 연쇄에 불과할 것이고, 과거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의 삶이란 얼마나 비참한가! 온갖 잘못된 상상들로 가득하고, 거의 우리의 기억이 내미는 환영들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만큼 무의미하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격리의 감정은 점점 더 끔찍해진다. (...) 그리고 오늘 나는 내 작품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나는 이미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바야흐로 내가 이미 거의 떠나버린 세상이 내 눈에는 특별한 비밀에 둘러싸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299~300쪽

 
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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