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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가지고 있던 책. 제목이나 뒤표지의 카피 문구는 꽤 촌스러웠다. 하지만 장르 문학을 전문적으로 내는 출판사여서 신뢰가 갔고, 좀비물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나는 좀비 영화를 꽤 좋아한다).
제목의 Z는 Zombie의 약자다. 줄거리는 '28일 후' 같은 좀비 영화들과 비슷하다. 어느날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정체 모를 바이러승 감염된다. 사람들은 가족과 친구가 병에 걸린 줄로만 알고 병원에 입원시키거나 집에서 간호한다. 이들은 최대 일주일 동안 바이러스에 시달린 뒤 좀비로 부활한다. 좀비들은 동물만 먹고, 인간보다 느리지만 오감이 비약적으로 발달하며,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도 물속에 있어도 사지가 절단되어도 죽지 않는다. 오직 '뇌'를 파괴당해야 죽는다. 바이러스의 확산 속도에 세계 어느 나라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 등등. 영화들은 대체로 특정 인물 혹은 집단에 주목하여 그들이 역경을 극복하거나 실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소설은 화자가 열댓 명의 인물과 나눈 인터뷰만으로 진행된다. 영화와는 판이하게 다른 구성이다. 작중 집필 시점은 좀비전쟁이 끝난 지 10년 후다. 전쟁 당시를 다섯 시기로 나누어 장 으로 묶었다. 인터뷰이들이 각 시기마다 어떤 상황에 처했고 어떤 일을 겪었는지 들려줌으로써 허구적 상황을 매우 사실적인 형식으로 세밀하게 보여준다. 거기다 대부분의 인터뷰가 한 차례로 끝나지 않는다. 특정인의 사연을 잊을 만하면 인터뷰가 다시 이어지면서 하나하나의 작은 이야기를 만들고 호기심을 갖게 한다. 인물의 숫자가 적지 않은 데도 이름 하나하나를 기억하려 애쓰게 만든다.
이와 같은 구성에 힘입어 소설은 지리적 제약을 손쉽게 뛰어넘는다. 전 세계 십여 개 이상의 나라에서 일어난 일을 다룬다. 주요 무대는 미국이지만 중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유럽, 일본 등지도 자세히 다루고 한국과 아이슬란드 같은 곳도 등장한다. 나라 별 정치 체제와 문화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대처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가장 특징적인 나라는 러시아, 중국, 쿠바. 러시아 부분만 간단히 요약해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전쟁 당시 모든 나라가 군대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러시아에선 탈주자가 속출했다. 이에 러시아 정부는 '1/10 처형'이라는 방법을 실행한다. 아홉 명이 한 명의 동료를 직접 '처형'하도록 강제한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전부 다 처형하겠다고 위협하면서. 명령에 복종하고 생존한 나머지 군인들은 공범자가 되었다. 동시에 효과적인 변경거리가 생겼다. '나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이후 탈주자의 숫자는 급격히 감소했다. 전후의 러시아는 정교일치의 제정 국가가 된다. 전지적 화자의 입이 아니라 사연을 가진 특정 인물의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접하는 허구의 세계사는, 전혀 지루하지 않을 뿐더러 생생하고 현실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