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대전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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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맥스 브룩스 (황금가지,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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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가지고 있던 책. 제목이나 뒤표지의 카피 문구는 꽤 촌스러웠다. 하지만 장르 문학을 전문적으로 내는 출판사여서 신뢰가 갔고, 좀비물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나는 좀비 영화를 꽤 좋아한다).

제목의 Z는 Zombie의 약자다. 줄거리는 '28일 후' 같은 좀비 영화들과 비슷하다. 어느날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정체 모를 바이러승 감염된다. 사람들은 가족과 친구가 병에 걸린 줄로만 알고 병원에 입원시키거나 집에서 간호한다. 이들은 최대 일주일 동안 바이러스에 시달린 뒤 좀비로 부활한다. 좀비들은 동물만 먹고, 인간보다 느리지만 오감이 비약적으로 발달하며,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도 물속에 있어도 사지가 절단되어도 죽지 않는다. 오직 '뇌'를 파괴당해야 죽는다. 바이러스의 확산 속도에 세계 어느 나라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 등등. 영화들은 대체로 특정 인물 혹은 집단에 주목하여 그들이 역경을 극복하거나 실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소설은 화자가 열댓 명의 인물과 나눈 인터뷰만으로 진행된다. 영화와는 판이하게 다른 구성이다. 작중 집필 시점은 좀비전쟁이 끝난 지 10년 후다. 전쟁 당시를 다섯 시기로 나누어 장 으로 묶었다. 인터뷰이들이 각 시기마다 어떤 상황에 처했고 어떤 일을 겪었는지 들려줌으로써 허구적 상황을 매우 사실적인 형식으로 세밀하게 보여준다. 거기다 대부분의 인터뷰가 한 차례로 끝나지 않는다. 특정인의 사연을 잊을 만하면 인터뷰가 다시 이어지면서 하나하나의 작은 이야기를 만들고 호기심을 갖게 한다. 인물의 숫자가 적지 않은 데도 이름 하나하나를 기억하려 애쓰게 만든다.

이와 같은 구성에 힘입어 소설은 지리적 제약을 손쉽게 뛰어넘는다. 전 세계 십여 개 이상의 나라에서 일어난 일을 다룬다. 주요 무대는 미국이지만 중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유럽, 일본 등지도 자세히 다루고 한국과 아이슬란드 같은 곳도 등장한다. 나라 별 정치 체제와 문화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대처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가장 특징적인 나라는 러시아, 중국, 쿠바. 러시아 부분만 간단히 요약해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전쟁 당시 모든 나라가 군대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러시아에선 탈주자가 속출했다. 이에 러시아 정부는 '1/10 처형'이라는 방법을 실행한다. 아홉 명이 한 명의 동료를 직접 '처형'하도록 강제한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전부 다 처형하겠다고 위협하면서. 명령에 복종하고 생존한 나머지 군인들은 공범자가 되었다. 동시에 효과적인 변경거리가 생겼다. '나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이후 탈주자의 숫자는 급격히 감소했다. 전후의 러시아는 정교일치의 제정 국가가 된다. 전지적 화자의 입이 아니라 사연을 가진 특정 인물의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접하는 허구의 세계사는, 전혀 지루하지 않을 뿐더러 생생하고 현실적이다. 

구성이 주는 장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각 인터뷰이마다 사회적 배경이 다양하다. 같은 현실을 두고 여러 층의 사실이 드러난다. 한 미국 사업가는 바이러스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을 때 치료약을 만들었다는 허위 광고로 떼돈을 벌었다. 그는 그 돈으로 남극 기지를 사고 전쟁이 끝난 지금도 숨어 지낸다. 전쟁을 수행하던 당시의 미국 재건 최고 책임자도 인터뷰하는데, 다음과 같은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전쟁 중 재건된 시스템은) 좀 더 지역화된 시스템의 결과였소. 이 시스템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노동력의 결실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전쟁에 승리하는 데 자신이 분명히 기여하고 있다는 걸 알려 줌으로써 개인적으로 자부심을 느끼게 해 주고, 나도 그 시스템의 일부라는 근사한 기분을 느끼게 해 줬소."(230쪽)

그런데 인류는 전 지구적 위기를 어떻게 극복한 것일까?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한 관료가 이후 모델이 되는 전략을 만들어 냈다. 살아남아 고군분투하는 다수 국민과 일부 군대에게 피난처를 속임으로써 좀비들이 한눈을 팔지 않게끔 한다. 나머지 주요 부대를 특정 지역(미국의 경우 록키산맥 서쪽)으로 이동시키고 지형을 활용한 안전선을 구축한다(한국의 경우 낙동강 전선). 전선 내부의 좀비를 완전히 소탕하여 안전지대로 만든 다음 전선을 전진시켜 가며 국내에 남은 존비를 완전히 소탕한다. 인접 국가는 좀비가 유입되지 않도록 국경선을 방어해준다. 이런 잔혹한 방법으로 세계 각국은 국가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고 극소수의 인류가 살아남는다. 

새삼 강조하자면 이 작품은 소설이고, 좀비 전쟁이라는 허구의 상황을 설정한 것이지만, 효과적인 구성과 구체적인 상상력에 힘입어 독자를 몰입하게 만든다. 작가는 소설이라는 문학 형식이 가지는 장점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현재 브래드 피트를 주연으로 영화화 중이라는 소식이 뒤표지에 적혀 있다. 비용 측면에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급이 아니고선 제작이 거의 불가능한 작품일 것이다. 밀리언셀러가 될 만한 작품이다.

덧.평소 장르소설은 잘 읽지 않는데, 놀라울 정도로 재밌는 작품 한 편 덕택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평을 썼다. 

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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