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년쯤 전이었나. 표지를 보고 참 독특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친구가 활동하는 연세대 교지 동아리방에서였다. 탁자 위 어지러운
더미에 올라와 있기에 야, 너 이런 책도 보냐 했더니 다른 친구가 읽고 있는 책이란다. 소설을 좋아하는 동료라며. 아마 얼마 뒤에 그이와 사귀기 시작한 걸로 알고
있다. 검은 바탕에 촌스럽기도 한 글자,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낙서로
된 표지가 그렇게 인상 깊었다.
1994년 1쇄에서 2010년 7월에 39쇄까지 나왔다. 개정판을 내지도
않았으면서 꾸준히 인기를 얻어온 것이다. 보르헤스라는 이름의 유명세를 생각하면 그럴 만하다. 한편 다른 이유도 있는 것 같다. 앞서 말한 대로 조금 촌스럽다 싶은 표지가
묘하게 멋스럽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번역의 질과 역자의 성실한 주석 덕분 아닐까 한다. 보르헤스가 직접 남긴 원주原註도 적지 않고 어떤 쪽은 역주만으로 가득하다. 성실한
주석은 그만큼 본문의 독서를 성가시게 만드는 측면이 분명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이미 원주가 잦으므로
역주를 탓할 까닭은 별로 없다.
역자가 적고 있듯 보르헤스가 20세기 후반 지성사에 끼친
영향은 말 그대로 '지대하다'. 이는 보르헤스 작품이 그만큼 여러 층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새롭고 독창적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애매하고
어렵다는 말도 된다. 역주는 폭넓고 난해한 보르헤스 작품들이 한 시대의 지성사와 어떤 지점에서 관계 맺고
영향을 미쳤는지 일일이 설명해 준다. 나 같은 보통 독자로서는 큰 도움이 되었다.
근래 나의 독서만 봐도 이 책 한 권을 읽으며 여러 책을 떠올렸다.
정혜윤 씨가 이 책에서 한 구절 발췌했었고, 김기협 씨는 '기억'이라는 개념과 관련해 보르헤스를 언급했다. 최제훈 소설집 『퀴르발 남작의 성』에서
「소녀의 매듭」은 아마 보르헤스의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에서 영감을 얻어 쓴 게 아닐까 싶다.
제발트 소설 『토성의 고리』에서 본 적 있는 이름을 여럿 마주치기도 했다. 보르헤스가 먼저 작품을
발표했고, 1970-80년대 유럽에서 보르헤스가 누렸을 인기를 고려하면 그가 보르헤스에게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고 상호 텍스트적으로 창작 활동을 했다고 생각할 만하다. 단지 이름과 소재의 측면만 아니라 『토성의 고리』의
전개 방식도 『픽션들』의 전체적인 주제 '기억'과 '시간'에 꽤 가깝다는 생각도 든다.
정혜윤 씨가 발췌한 구절은 원주의 일부이다. 원문을 직접
확인했을 때 픽 하고 웃음이 나왔다. 먼저, 정혜윤 씨의 발췌문은 다음과
같다. "책을 읽을 때는 나는 나지만 또 나는 내가 아닌 것처럼, 보르헤스가
셰익스피어를 읽는 자는 그 순간 셰익스피어고 호머를 읽는 자는 그 순간은 호머라고 했던 것처럼, 여행지에서
우리는 우리지만 우리가 아니기도 하다. 우리는 하나지만 수없이 많은 영혼이다."(『여행, 혹은 여행처럼』 272쪽) 자 그럼, 보르헤스의 원문은 어떨까? "44) 요즈음 틀뢴의 한 교회는 플라톤적으로
어떤 고통, 초록색이 감도는 어떤 노란색, 어떤 온도, 어떤 소리가 유일무이한 실재라고 주창한다. 눈이 핑핑 도는 성교의 순간에 있어
모든 사람들은 동일한 사람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암송하고 있는 모든 사람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이다."(37쪽,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중에서) "눈이 핑핑 도는 성교의 순간에 있어
모든 사람들은 동일한 사람이다."라는 앞 문장을 쏙 빼 놓고 옮겨 적은 게 재미있지 않나. 발췌 의도와 관련 없으니 빼는 게 당연했겠지만. 참고로, 『픽션들』에는 셰익스피어를 언급한 대목이 또 있다. "한 사람이 어떤
일을 했다면 그것은 마치 모든 사람들이 했던 거나 다름이 없는 거지요. 그래서 에덴 동산에서 저질러진 한
차례의 불복종이 인류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전혀 부당한 일이 아닌 거지요. (...) 그렇게 보면
쇼펜하우어의 말이 일리가 있는 거지요. 나는 다른 사람들이고, 그 어떤
사람도 모든 인간이고, 셰익스피어는 일종의 가련한 존 빈센트 문이다라는."(196쪽, 「칼의 형상」 중에서)
'신선하다'. 정말 새로웠다.
기억과 시간, 이라는 주제부터 원래 흔치않다. 거기에 추리소설의
형식을 결합하여 읽는 내내 흥미진진했다. 거의 모든 작품에서 드러나는 '도서관적'인 박식함은 독보적이다. 후대의 여러 소설가들이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십중팔구
보르헤스에 대한 오마주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실제로 보르헤스는 거의 평생 도서관에서 일했다고 한다. 「바벨의 도서관」은 그런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싶었다.
말을 한다는 것은 동어반복을 범하는 것을 의미한다. (...) 모든
것이 이미 씌어졌다는 명백한 사실 앞에서 우리는 폐기처분되어 버리거나 환영으로 돌변해 버린다. 142쪽, 「바벨의 도서관」 중에서
그러나 <도서관>은 영원히 지속되리라. 불을 밝히고, 고독하고, 무한하고, 부동적이고, 고귀한 책들로 무장하고, 쓸모없고, 부식하지 않고, 비밀스러운 모습으로 말이다.
나는 바로 앞에서 <무한하고>라는 말을 썼다. 나는 수사학적인 관습에 따라 이 형용사를 삽입시킨 게 아니다. 내 말은 세계가
무한하다고 생각하는 게 결코 비논리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세계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저
아득한 곳에 이르면 그들이 상상하는 어떤 모습으로 낭하들과 층계들과 육각형 진열실들이 끝이 날 수도 있다고 가정하는 거나 다름없다. 그것은 이치에 어긋난 생각이다. 반대로 세계에서 한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가능한 책의 수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망각하고 있음에 다름 아니다. 나는 그 오래된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한다. <'도서관'은 한계가 없지만 주기적이다.> 만약 어떤 영원한 순례자가 어느 방향에서 시작했건 간에 도서관을 가로질렀다고 하자. 몇 세기 후에 그는 똑같은 무질서(이 무질서도 반복되면 질서가 되리라, 신적인 질서) 속에서 똑같은 책들이 반복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리라. 나는 고독 속에서 이 아름다운 기다림으로 가슴이 설레고 있다. 143쪽, 「바벨의 도서관」 중에서
1부에 실린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와 「바벨의 도서관」이 가장 인상 깊었다. 「틀뢴…」을 읽을 때는 ‘관념적임’이 주는 희열을 느꼈다. 2부의
단편들은 모두 다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유다에 관한 세 가지 다른 이야기」는 서너 군데 무슨 이야기인지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집에 두고 생각날 때마다 다시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을 것 같다. 어느 대목에서 갑자기 멈추고 혼자 사색에 잠기기 딱 좋은 책이다. ‘시간’ 혹은 ‘기억’,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 앞에서 선택을 강요 당해온 ‘우리 자신’ 같은 것들에 대해서. 한겨레21에서 마련한 책 꾸러미에는 『픽션들』외에 보르헤스 전집이 한 권 더
들어가 있었다. 다른 한 권도 ‘언젠가 꼭 읽어’ 보고 싶다.
어떤 단어를 강조하기 위한 가장 뛰어난 방법은 그것을 <영원히> 생략해 버리거나, 췌사적인 은유, 또는 뻔히 드러나는 우회적인 언어에 호소하는 방법일 겁니다. 164쪽,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