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세계문학전집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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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조지 오웰 (민음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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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 이어 <1984>를 읽었다. 둘 다 처음 읽는 거였다. 그 전엔 왠지 모르게 두 작품의 세계가 비슷할 거라 생각했다. 아무 근거 없는 생각이었음을 알게 됐다. 둘은 전혀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다만 그런 세계의 탄생 과정을 설명하는 역사적 줄거리가 비슷할 뿐이다. 세계 대전의 발발, 독재 권력의 등장, 발달한 과학 기술, 사회를 효율적으로 감시하는 권력 기구의 탄생 같은 것. 오웰의 소설이 17년 늦게 발표되었지만 둘은 완전히 다른 세계와 결론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멋진 신세계>에서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쾌락을 즐기며 확실히 행복하다. 소마 같은 약물을 통해 손쉽게 쾌락에 빠진다. 유전자 변형으로 똑같은 인간을 대량 복제함으로써 갈등의 소지를 제거한다. 절대 다수가 현재를 긍정하며 피라미드 구조의 계층 사회를 당연시한다. 물질적으로도 부족할 것 없이 풍요로운 편이다.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해선 안 될 인간적 가치, 개성.창작.예술의 자유 같은 것이 있다고 절규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지당한 말 같다. 하지만 독일 국민의 절반 이상이 나치즘을 승인했던 때가 불과 60여 년 전이다. 작품은 1932년에 발표됐다.
반대로 <1984>의 세계는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현실적이다. 그 세계는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와 원리의 측면에서 매우 유사하다. 규율과 감시, 애국심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기술 등등. 텔레스크린 같은 것은, 기술적으로는 현대 사회에서도 아무런 문제없이 적용 가능하다(실제로 아주 조금 다를 뿐 이미 작동하는 거나 다름없다). 절대 다수의 노동자 계층은 오늘날과 큰 차이가 없는 가난한 생활을 영위한다. 그들은 조국과 전쟁에 열광하고, 역사나 정치 같은 것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1984>는 현대 사회의 권력과 제도의 포장을 벗겨 내고 그 본질과 원리를 건조한 세계에서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중 사고' 같은 개념은 처음 접할 땐 허무맹랑한 소리 같았다.

'이중사고'를 창출해 낸 사람들이 '이중사고'를 가장 교묘하게 행하고, '이중사고'가 엄청난 정신적 기만 체계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임은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다. 우리 사회에서 현재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현실 그대로의 세계를 가장 모른다. 일반적으로 이해력이 좋으면 좋을수록 착각을 많이 하고,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정신이 덜 건전하다. 이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사회적 지위가 높아질수록 전쟁에 대한 열망이 높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299쪽

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4대강이나 한-미FTA 같은 국가적 정책에 대해 온갖 과학과 명분을 들며 적극 찬성하고 나서는 학자, 언론인, 관료들을 보면 저들이 바로 '이중사고'의 주인공임을 깨닫게 된다. 본인들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4대강 사업의 본질은 토건 경제를 부양하려는 안간힘임을, 한-미FTA가 국민 중 절반도 안 되는 계층에게만 이득이 될 것임을. 동시에 그들의 충심 어린 표정과 끊임없는 설득을 보노라면 본인의 말을 믿지 않고서는 저럴 수 없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놀라운 일을 해낸 것이다. 두 가지 모순된 주장을 본인의 편의에 따라 골라 믿을 수 있는 인간, 그러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릴 수 있는 인간이 탄생한 것이다. 조지 오웰은 당대의 지배 계층을 비꼬려는 의도로 '이중사고'와 같은 개념을 발명한 게 아니다.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소설가로서 불가해한 현실을 설명하고자 했다.

개인적 기억(흔히 말하는 '기억')과 집단적 기억('역사')은 상호 보완적이다. 일반적으로 다수의 기억이 모여 역사를 형성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정치 투쟁이 뒤따른다. 역사는 현재의 우리가 서 있는 위치를 결정짓기 때문이다. 역사는 우리가 어느 길을 걸어왔고 지금 어느 갈래에 서 있는지, 그러므로 어느 길로 더 나아가야 할지 결정짓는다. 현재를 자기 입맛에 맞게 규정하려면 집단의 기억인 '역사'를 바꿔야 한다.
1980년 봄 광주에서 일어난 일을 예로 들어보자. 당시 광주 시민들은 군대가 시민을 무차별 학살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하지만 기술적 제약과 군사 정부의 엄격한 통제에 의해 사실은 다른 지역으로 온전히 전달되지 못했다. 군사 정부는 광주.전라도 지역민을 폭도로 규정하고 국가적 위기에 따른 정당한 무력 진압이었다고 설명했다. 거기에 교묘히 지역감정을 끼워 넣어 타 지역민들이 광주.전라도 지역민들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인정하지 않도록 부추겼다. 진실을 포기하지 않으려 노력한 사람들이 마침내 군사 정부를 몰아냈다. '1980년 광주'의 진실을 지키고 개인의 기억을 역사로 이끈 성과는 정치 투쟁의 결과물이었다. 그 투쟁이 실패로 끝났다면, 진실을 기억하는 개인들이 윈스톤처럼 자신의 기억을 의심하며 집단적 기억에 굴복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을 기억하는 개인과 그들이 남긴 기록 모두가 사라지고 '1984'와 같은 사회가 도래했다면, 무엇이 진실인지 알아낼 길은 영영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윈스톤은 그녀와 이야기하는 동안 정통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면서도 정통적인 태도를 갖는다는 게 얼마나 쉬운 일인가를 깨달았다. 어떤 면에서 당의 세계관은 그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가장 잘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도 납득하지 못할 뿐더러 현재 일어나고 있는 공적인 사건에 대해 무관심하기 때문에 가장 악랄한 현실 파괴도 서슴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무지로 인해 정상적인 정신 상태를 유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집어삼켜도 탈이 나지 않는다. 그것은 곡식의 낱알이 소화되지 않은 채 새의 창자를 거쳐 그대로 나오는 경우처럼 뒤에 아무런 찌꺼기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222쪽

옳음이나 정의 같은 사회적 기준은 본래 너무 허약하다. 친구들과 논쟁하다가 '옳음'이나 '정의'를 판단하는 기준이 얼마만큼 흐릿한지를 알고 놀란 적 있다. 한국 재벌의 부당한 경영권 세습 과정에 대해 '어떻든 돈 많이 벌어서 국가 경제에 보탬이 되면 그게 좋은 거 아냐?'라는 반문을 어렵지 않게 접했다. 이러저러한 사실 관계를 설명하며 논쟁을 이어가다 보면 결국 가치 판단의 영역에 도달한다. 평등과 불평등, 정의와 부, 정당함과 부당함 같은 것들. 때로는 '그래, 그게 불평등/부/부당함 인 건 알겠지만, 그래도 먹고 사는 게 중요하지'와 같은 대답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 자신이 불평등/부/부당함을 옹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뚱한 표정으로 나를 이상한 사람 보듯 바라본다. 그럴 때면 가끔은 내가 정말 이상한 사람인 것 같기도 했고, 괜한 이야기를 꺼냈다고 생각하며 우울했다.

소설의 결말이 너무 비관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다른 식의 결말보다 이게 더 진실에 가까운 거라고 느꼈다. 이런 결말을 보고서도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라고 말할 깜냥은 못 된다. 그보다 <1Q84>의 다음 구절이 내 마음속에 깊이 와 닿았다. "진실을 아는 것만이 인간에게 올바른 힘을 부여해준다. 그것이 설령 어떤 모습의 진실이라 해도."(2권 593쪽)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게 있다는 사실이 위안을 준다(그것을 포기할지 말지는 일단 논외로 하고). 때로는 진실이 패배하더라도, 길게 놓고 보면 결과적으로 이겨왔다고 생각한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나는 이제 예전처럼 낙관적으로 보지는 못할 것 같다. 내게 현실은 언제나 아슬아슬하다.


위기의 순간에 싸워야 할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육체라는 사실에 그는 적잖이 당황했다. 술을 마셨는데도 복부의 통증이 완전히 가라앉지 않아 생각을 체계적으로 할 수가 없었다. 상황이 영웅적이든 비극적이든 외관상으로는 전혀 다를 게 없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전장에서나 고문실에서나 침몰하는 배 안에서나 사람들은 늘 진정으로 싸워야 할 상대를 잊어버린다. 육체가 온 우주를 덮을 정도까지 부풀어 오르고 공포나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는 극단적인 경우가 아닌 일상적인 때라도 삶이란 굶주림, 추위, 불면증, 복통, 치통 등을 상대로 순간순간 끊임없이 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144쪽

그들은 여전히 군중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그녀의 손이 그의 손을 더듬는 듯하더니 별안간 꽉 쥐었다가 놓았다. / 그 순간이 십 초도 안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꽤 오랫동안 손을 마주잡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165쪽

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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