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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권이 600쪽 가까이 되는 3권짜리 소설이다. 이걸 사흘 만에 다 읽었다. 하루에 한 권. 다른 데 한눈팔지 않고 온전히 집중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래야만 한다는 목표나 사정 같은 건 없었다. 오직 작품의 흥미로움이 그렇게 만들었다. 하루키 소설은 언제나 그랬다. 현실적이고 뚜렷한 결말 같은 게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이야기의 전개를 궁금하게 만든다. 그 힘의 정체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개성 넘치고 실감 나는 인물, 극복하기 힘들어 보이는 난관의 등장, 닥쳐오는 위기에서 비롯되는 긴박한 분위기 같은 것들. 거기에 그만의 독특하고 아름다운 묘사 그리고 정확한 서술은 독서를 북돋는다.
이 긴 장편소설은 중심 주제 외에도 여러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중 인상적이었던 것은 편집자 고마쓰와 소설가 지망생 덴고가 주고받는 대화, 그들의 관계였다. 후반부 들어 비중이 급격히 줄기 전까지 고마쓰는 핵심 인물이다. 그가 비교적 성공적인 편집자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를 현실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작가 본인이 소설가로서 일상적으로 겪고 관계 맺은 분야였으니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일본 사회에서 한 사람의 소설가와 한 편의 소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등장하는지도 알 수 있다.
작중 등장인물이 쓴 소설이 소설 속 현실에 실제적인 힘을 가하고 그것을 변형시킨다는 모티프 자체는 그리 새로운 건 아니다. 이런 장치를 사용한 의도는 아마도 소설 혹은 소설가, 라는 것에 대해 작가가 뭔가를 말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하루키 소설에는 소설가적인 남자 주인공이 자주 등장했다. 그것도 작가 본인을 무척 닮은 듯한. 일상을 계획적으로 살고, 자족적이고 자립적인 만큼 외로운 남자. 그는 적어도 자신의 육체와 그것이 존재하고 있는 공간만큼은 통제하려 하지만 불가해한 사태 같은 게 그의 일상에 들이닥친다. 주로 여성인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헤치고 난관을 극복한다는 줄거리는, 불가해한 현실에 맞닥뜨렸을 때 그것을 이해하고 소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소설가의 삶을 닮았다.
소설의 중심 주제가 무엇인지는 읽기 전부터 짐작가는 게 있었다. 작가가 이 소설을 들고 현실로 나선 맥락을 가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소설을 받치고 있는 것들
이 긴 장편소설은 중심 주제 외에도 여러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중 인상적이었던 것은 편집자 고마쓰와 소설가 지망생 덴고가 주고받는 대화, 그들의 관계였다. 후반부 들어 비중이 급격히 줄기 전까지 고마쓰는 핵심 인물이다. 그가 비교적 성공적인 편집자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를 현실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작가 본인이 소설가로서 일상적으로 겪고 관계 맺은 분야였으니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일본 사회에서 한 사람의 소설가와 한 편의 소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등장하는지도 알 수 있다.
작중 등장인물이 쓴 소설이 소설 속 현실에 실제적인 힘을 가하고 그것을 변형시킨다는 모티프 자체는 그리 새로운 건 아니다. 이런 장치를 사용한 의도는 아마도 소설 혹은 소설가, 라는 것에 대해 작가가 뭔가를 말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하루키 소설에는 소설가적인 남자 주인공이 자주 등장했다. 그것도 작가 본인을 무척 닮은 듯한. 일상을 계획적으로 살고, 자족적이고 자립적인 만큼 외로운 남자. 그는 적어도 자신의 육체와 그것이 존재하고 있는 공간만큼은 통제하려 하지만 불가해한 사태 같은 게 그의 일상에 들이닥친다. 주로 여성인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헤치고 난관을 극복한다는 줄거리는, 불가해한 현실에 맞닥뜨렸을 때 그것을 이해하고 소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소설가의 삶을 닮았다.
소설의 중심 주제가 무엇인지는 읽기 전부터 짐작가는 게 있었다. 작가가 이 소설을 들고 현실로 나선 맥락을 가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소설을 받치고 있는 것들
"우리의 기억은 개인적인 기억과 잡단의 기억이 합쳐져 만들어지는 거야." 덴고는 말했다. "그 두 가지 기억은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지. 그리고 역사라는 건 집단의 기억을 말하는 거야. 그것을 빼앗으면, 혹은 고쳐 쓰면 우리는 정당한 인격을 유지할 수 없어." 1권 544쪽
"역사 속의 대량학살하고 똑같아. (...) 저지른 쪽은 적당한 이론을 달아 행위를 합리화할 수도 있고 잊어버릴 수도 있어. 보고 싶지 않은 것에서 눈을 돌릴 수도 있지. 하지만 당한 쪽은 잊지 못해. 눈을 돌리지도 못해. 기억은 부모에게서 자식에게로 대대로 이어지지. 세계라는 건 말이지, 아오마메 씨, 하나의 기억과 그 반대편 기억의 끝없는 싸움이야." 1권 623쪽
"역사 속의 대량학살하고 똑같아. (...) 저지른 쪽은 적당한 이론을 달아 행위를 합리화할 수도 있고 잊어버릴 수도 있어. 보고 싶지 않은 것에서 눈을 돌릴 수도 있지. 하지만 당한 쪽은 잊지 못해. 눈을 돌리지도 못해. 기억은 부모에게서 자식에게로 대대로 이어지지. 세계라는 건 말이지, 아오마메 씨, 하나의 기억과 그 반대편 기억의 끝없는 싸움이야." 1권 623쪽
먼저 손에 잡히는 것부터 밝혀보자. 첫째로 조지 오웰의 고전 <1984>를 들 수 있다. 소설가 조지 오웰의 마지막 작품이자 후대에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장편 소설이다. 제목부터 두 작품의 관련성이 직접 드러난다. 게다가 <1Q84>는 1984년 일본을 무대로 삼고 있다. 서너 대목에서 원작을 직접 언급하고 인용한다. 원작에 등장하는 독재 권력 '빅 브라더'와 <1Q84>의 '리틀 피플'은 그 이름에서부터 관련성을 뚜렷이 보여준다. 저자도 어떤 인터뷰에서 오웰의 소설에서 영감을 얻었음을 밝힌 적 있다.
두 번째는 1994년 일본에서 일어난 '옴진리교 사린 가스 테러 사건'이다(며칠 전 신문에 테러 사건을 주도한 교단 간부 중 한 사람에게 사형 판결이 내려졌고 이로써 관계자 전원에 대한 사법 절차가 완료되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일본 형사법에 따라 교주 아사하라 쇼코를 포함한 관계자 전원을 처벌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사건에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섣부른 단죄 이전에 사태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사건에 직접 관계가 있는 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한다. 그 결과물이 문학동네가 최근 출판한 <언더그라운드 1.2>이다. 각각은 피해자 및 가해자들과 나눈 인터뷰 모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책 말미에는 작가 나름의 해석이 실려 있다.
나는 <언더그라운드>를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국내 출판된 하루키의 거의 모든 중.장편소설을 읽었지만 이 두 권의 인터뷰 집으로 그의 가치관 혹은 세계관을 조금이나마 엿본 느낌이었다. 두 권의 책에서 작가는 옴진리교라는 종교 조직과 그 구성원들의 세계와 관점을 이해해보려고 했다. 그 부분이 소설 <1Q84>에 담겨 있다. 조금 길지만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언더그라운드>를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국내 출판된 하루키의 거의 모든 중.장편소설을 읽었지만 이 두 권의 인터뷰 집으로 그의 가치관 혹은 세계관을 조금이나마 엿본 느낌이었다. 두 권의 책에서 작가는 옴진리교라는 종교 조직과 그 구성원들의 세계와 관점을 이해해보려고 했다. 그 부분이 소설 <1Q84>에 담겨 있다. 조금 길지만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선도 없고 절대적인 악도 없어." 남자는 말했다. "선악이란 정지하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장소와 입장을 바꿔가는 것이지. 하나의 선이 다음 순간에 악으로 전환할지도 모르는 거야. 그 반대의 경우도 있지.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묘사한 것도 그러한 세계의 양상이야. 중요한 것은 이리저리 움직이는 선과 악에 대해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지. 어느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면 현실적인 모럴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돼. 그래, 균형 자체가 선인 게야." 2권 289쪽
카를 융은 어느 책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어. '그림자는 우리 인간이 전향적인 존재인 것과 똑같은 만큼 비뚤어진 존재이다. 우리가 선량하고 우수하며 완벽한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림자 쪽에서는 어둡고 비뚤어지고 파괴적으로 되어가려는 의지가 뚜렷해진다. 인간이 스스로의 용량을 뛰어넘어 완전해지고자 할 때, 그림자는 지옥에 내려가 악마가 된다. 왜냐하면 이 자연계에서는 인간이 자기 자신 이상의 존재가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 이하의 존재가 된다는 것과 똑같은 만큼의 깊은 죄악이기 때문이다.' 2권 326쪽
카를 융은 어느 책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어. '그림자는 우리 인간이 전향적인 존재인 것과 똑같은 만큼 비뚤어진 존재이다. 우리가 선량하고 우수하며 완벽한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림자 쪽에서는 어둡고 비뚤어지고 파괴적으로 되어가려는 의지가 뚜렷해진다. 인간이 스스로의 용량을 뛰어넘어 완전해지고자 할 때, 그림자는 지옥에 내려가 악마가 된다. 왜냐하면 이 자연계에서는 인간이 자기 자신 이상의 존재가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 이하의 존재가 된다는 것과 똑같은 만큼의 깊은 죄악이기 때문이다.' 2권 326쪽
내 생각에 이번 작품은 작가의 소설 중에서 사회적인 메시지를 가장 뚜렷하게 담고 있다. <언더그라운드>는 <1Q84>를 최종 보고서를 위한 사전 스케치 작업인 셈이다. 작가가 계획한 바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소설가이고, 소설가는 현실을 자기 나름으로 소화하여 소설로 내놓는 사람이다. <1Q84>는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눈앞에 닥친 불가해한 현실을 '문학'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자 결과물이다.
이야기의 숲에서는 사물 간의 관련성이 제아무리 명백하게 묘사되어 있어도 명쾌한 해답이 주어지는 일은 없다. 그것이 수학과의 차이다. 이야기의 역할을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하나의 문제를 다른 형태로 바꿔놓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동의 질이나 방향성을 통해, 해답의 방식을 이야기 형식으로 암시해준다. 덴고는 그 암시를 손에 들고 현실 세계로 돌아온다. 그 암시는 이해할 수 없는 주문이 적힌 종이쪽지 같은 것이다. 때로 그것은 모순을 지니고 있어서 곧바로 실제에 적용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은 가능성을 품고 있다. 언젠가 나는 이 주문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가능성이 그의 마음을,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덥혀준다. 1권 380쪽
20대 이전에는 기꺼이 그의 책을 손에 들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출간된 지 일이 년이 지나서야, 못마땅해 하며 남한테 빌려 읽었다. 그의 작품들이 공유하는 특유의 분위기와 문학적 결론 같은 게 싫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항상 재미있게 읽었다. 이번 소설을 읽고 나서야 지금까지 명확히 인식하지 못했던 매력을 적어도 하나 알게 됐다. 내 힘으로 발견한 건 아니다. 편집자 고마쓰와 여주인공 아오마메가 덴고의 소설을 평가하는 대목을 통해서였다. 꼭 작가 자신의 소설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하루키 소설의 문장은 모두 고유한 온도를 갖고 있다. 어조도 어조이지만, 그만의 '비유'가 핵심이다. 그는 그다운 방식으로 사물을 묘사한다. "창밖의 하늘을 뭔가 작고 검은 것이 빠르게 가로질러갔다. 새인지도 모른다. 혹은 누군가의 영혼이 세계의 끝까지 날려갔는지도."(1권 304쪽), "그것은 아마도 순수한 고독과 고요함이었으리라. 그것은 달이 사람에게 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니까."(2권 464쪽), "아다치 구미의 표현을 빌린다면, '한 장의 나뭇잎'으로서 의식의 등불을 끄고, 모든 감각의 문을 닫고, 계절이 새겨지는 시각이 도래하기를 기다렸던 것이다."(3권 525쪽) 등등. 의식하고 읽으면 곳곳에서 '아, 그래, 이런 거지'하고 수긍하게 된다. 그리고 새삼 놀란다. 대체 얼마만큼 고민한 걸까. 얼마나 많은 사물과 정경, 풍경을 관찰하고 기억 속 창고에 쌓아온 걸까.
이 작품에서 사랑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좀 어이없다 싶을 정도로 그렇다. 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줄거리와 흡사하다. 이건 어쩌면 일본적인 특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20여 년 전 단 한 차례, 이십 초나 될까 싶은 순간 손을 꼭 잡았을 뿐이었던 소년소녀 사이의 사랑이 결국 이뤄지는 줄거리. 원작 <1984>와는 정반대의 결말이다. <1Q84>는 결국 사랑이라는 희망, 유일한 구원의 계기를 이야기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필요하긴 하니까.
하루키 소설의 문장은 모두 고유한 온도를 갖고 있다. 어조도 어조이지만, 그만의 '비유'가 핵심이다. 그는 그다운 방식으로 사물을 묘사한다. "창밖의 하늘을 뭔가 작고 검은 것이 빠르게 가로질러갔다. 새인지도 모른다. 혹은 누군가의 영혼이 세계의 끝까지 날려갔는지도."(1권 304쪽), "그것은 아마도 순수한 고독과 고요함이었으리라. 그것은 달이 사람에게 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니까."(2권 464쪽), "아다치 구미의 표현을 빌린다면, '한 장의 나뭇잎'으로서 의식의 등불을 끄고, 모든 감각의 문을 닫고, 계절이 새겨지는 시각이 도래하기를 기다렸던 것이다."(3권 525쪽) 등등. 의식하고 읽으면 곳곳에서 '아, 그래, 이런 거지'하고 수긍하게 된다. 그리고 새삼 놀란다. 대체 얼마만큼 고민한 걸까. 얼마나 많은 사물과 정경, 풍경을 관찰하고 기억 속 창고에 쌓아온 걸까.
이 작품에서 사랑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좀 어이없다 싶을 정도로 그렇다. 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줄거리와 흡사하다. 이건 어쩌면 일본적인 특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20여 년 전 단 한 차례, 이십 초나 될까 싶은 순간 손을 꼭 잡았을 뿐이었던 소년소녀 사이의 사랑이 결국 이뤄지는 줄거리. 원작 <1984>와는 정반대의 결말이다. <1Q84>는 결국 사랑이라는 희망, 유일한 구원의 계기를 이야기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필요하긴 하니까.
이것이 계속 산다는 것의 의미다. 아오마메는 그것을 깨닫는다. 인간은 희망을 부여받고, 그것을 연료로, 목적으로 삼아 인생을 걸어간다. 희망 없이 인간이 계속 살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동전 던지기와도 같다. 앞면이 나올지 뒷면이 나올지는 동전이 떨어질 때까지 알지 못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옥죄어온다. 3권 112쪽
그래서 다 읽고 났을 때 좀 싱거운 느낌이었다. 결국 이것뿐인가, 이것밖에 말할 수 없는 건가. 혹은 작품이 세계에 초점을 맞추고 잇는 방식이 내겐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소설은 제발트의 작품이다. 그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세계가 나를 더 매혹한다. 슬픈 발상일지도 모르겠다. 결국에 내가 가 닿는 지점도 아마 사랑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거기까지 가는 나만의 설득력 있는 방식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건 문학으로는 불가능하다. 현실의 직접 경험, 삶의 경험이라는 영역에서만 가능한 과정이다. 조바심쳐 봤자 소용없다. 그러므로 이번 소설은 내게 다음과 같은 마음으로 남았다. 조언과 충고에 주의 깊게 귀 기울이되, 지금까지처럼 살아가자는 것.
진실을 아는 것만이 인간에게 올바른 힘을 부여해준다. 그것이 설령 어떤 모습의 진실이라 해도. 2권 59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