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후반 학번으로, 대학 때 연애만 했다던 그녀. 공연 기획자라는 직업을 마지막으로 20대 후반에 프랑스로 훌쩍 떠나버린 그녀. 구체적으로 나이가 몇 인지는 모르겠지만 10살 정도 차이가 나는 프랑스 남자와 연애를 하고 아이를 낳은 비혼 여성. '칼리'라는 이름의 예쁜 딸을 품에 안고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는 그녀. 2004년 쯤, 한국에 돌아와 총선에서 10석의 의원을 배출한 민주노동당에 정책연구원으로 들어갔지만, 권위적인 조직 문화와 일상적인 임금체불 등의 문제를 겪으며 민주노동당 노동조합 사무국장까지 지내게 되고 결국 분당 이후 탈당해 진보신당 당원이 된 그녀.
그런 사람이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살아가기'라는 부제를 달고 '레디앙'이라는 인터넷 진보 언론에 글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민주노동당 분당으로 시끄러워지자 결국 연재를 그만두고 혼자 글을 써 책을 메웠다.
연재 당시 목수정씨의 글에 달린 댓글을 보면서 자칭 좌파라는 사람들 중에도 이렇게 못난 인간들이, 보고 있으면 비참할 정도로 슬퍼지는 인간들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네이버 악플들, 저리 가라 였다. 그 모습을 결정적으로 본 뒤 난 더 이상 레디앙에 들어가지 않는다. 좋은 칼럼니스트들이 많은 매체이지만 정치 관련 뉴스에서 진보신당 소식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도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레디앙에 댓글 다는 인간들 중 상당수가 내가 좌파인 게 부끄러울 정도로 못난 인간들인 것 같았다.

어제 이음책방에서 다른 몇 권의 책과 함께 샀다. 학림으로 곧장 가서 2층 가장 구석자리에 퍼질러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3시간동안 아주 집중해서 재밌게 읽었다. 집에 들어와 잠자리에 누워서도, 오늘 아침 일어나 책상에 앉아서도 계속 읽었다.
프랑스 생활을 담은 글은 흥미로운 보고서 같다. 한국과 프랑스를 비교하는 대목이 곳곳에 등장한다. 한국 사회에서 가부장제 때문에, '둘째 딸'이라는 것 때문에, '여성'이기 때문에 받은 상처와 억압들의 흔적을 온 몸에 고스란히 새긴 채 프랑스로 떠나온 그녀였다. 그 상처들과 흔적들을 치유케 하는 프랑스 사회의 대기를 숨 쉬면서 느낀 그녀의 감흥은 독특하고 강렬하다.
그녀는 실제로 만나보면 아마 조금 까칠한 성격일 것 같다. 그치만 그녀의 글을 읽으며 생각해본 그녀는, '아주 매력적인 사람'이다. 흥미로운 사람. 내면에 고통의 경험을 승화해 내공으로 축적했든, 방대한 지식을 담고 있든, 그것이 발랄한 예술적 감수성이든, 깊고 진중한 문학적 언어든, '타인에게 보일 수 있는 무언가'를 담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매력적이고 흥미롭다. 나는 그런 사람을 좋아한다. 무언가를 배울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나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 자신의 독특한 정체성 - 여성, 백인 유럽 남자와 결혼하지 않은 채로 살아가며 게다가 아이를 가졌다는 것, 대학 시절 운동권이 전혀 아니었음에도 진보정당 당직자로 일해본 경험 - 과 그녀 자신의 풍부하고 날카로운 지식이 지극히 사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글을 만들어냈다.

사람은 자유를 통해서가 아니라 관계를 통해서 존재를 확인한다. (51쪽)
사회가 정상이라고 말하는 틀을 조금이라도 이탈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롭게 숨쉬는 자로 첫발을 내딛을 수 있다. 물론 그러한 결핍 혹은 비정상이 내 발목을 잡을 족쇄가 아니라 자유로운 도약의 기회라는 것을 아는 자에 한해서. /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상처를 겪거나 경험한다. 그런 시련은 누구에게나 찾아오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식이야말로 고유 색깔을 가진 자아의 주체로 설 수 있게 만들어준다. (92쪽)
스스로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말하는 이들이 마르크스만큼 문화를 즐길 줄 알았다면, 마르크스주의가 20세기 말에 와서 이렇게까지 푸대접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르크스가 이 세상에서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셰익스피어를 한없이 읽는 것이었음을 그의 딸들은 증언하고 있다. (288쪽)

정말 재밌게 읽었다. 참. 좌파는 '생명'을 우파는 '죽음'을 지향한다는 통찰은 아주 놀라우면서 동시에 통쾌했다. 내 정치적 신념이 슬슬 다다르고 있는 곳이 '생명'이기도 하다.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카테고리 정치/사회
지은이 목수정 (레디앙,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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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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