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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을 오고 가다 슈퍼에 들러 고로케 샌드위치를 샀다. 다른 곳에서 그러듯이 점원에게 인사를 건넨다. 냉방이 참 잘 되는데, 계속 여기 있으면 춥지 않느냐고. 사실 좀 춥다며, 그녀는 수줍게 웃고 동전을 센다. 괜히 신이 난다.
어느 날, 평소처럼 샌드위치를 건넨 참이었다. 어디선가 오르골 소리가 울린다. 그녀의 손목시계에서 나는 소리였다. 근무가 끝났음을 알리는 알람이다. 손목시계에 오르골 소리,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며칠 동안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오늘도 없다면 일을 그만두었을 것이다. 슈퍼 문을 열고 들어간다. 아무도 없다. 부스럭 대며 누군가 나온다. 그녀가 아니다. 샌드위치를 사고 문을 나섰고, 길을 걷는 동안 불쑥 이런 생각을 한다. ‘또, 잃어버렸구나.’
어디선가 오르골 소리가 들린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또 들린다. 눈앞 가게에서 틀어놓은 음악인가 싶어 들어가 본다. 아니다. 거리로 나와 귀를 기울인다. 가까운 곳. 설마.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니 며칠 전에 새로 산 핸드폰의 착신음이다. 그사이 부재중 전화가 3통이나 와 있었다. 등록되지 않은 번호다. 누굴까. 필요한 용무라면 다시 전화를 걸 테지만, 기분이 이상하다. 오르골 소리라니, 그녀가 사라진 걸 알고 난 직후에.
조용한 골목으로 들어가 전화를 걸었다. 그 목소리, 그 이름, 슈퍼에서 잃어버린 그녀.
언젠가 고로케 샌드위치가 새로 들어오면 연락을 달라고 번호를 건넨 적 있었다. 안부를 주고받는다. 가정을 갖게 되어서 일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축하합니다. 앞으로 만날 일은 없겠지만, 묻고 싶었다. “그 손목시계, 요즘도 오르골로 알람이 울리나요?” “네, 그럼요, 울리지요. 매일.” “잘됐어요. 정말 잘됐어요.” “그래요?” “그럼요. 소중하게 간직하세요.” “…네.” 주머니 속의 휴대폰을 가볍게 움켜쥐고, 계속 걷는다.
위의 일화는 저자가 직접 겪은 일이다. 요약문만 보면 연애소설 냄새가 좀 나는데 본래 이야기는 전혀 그렇지 않다. 다시 꾸며 쓰는 일도 쉬운 게 아니구나. 에휴.
“쓰고 싶은데도,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여력이 없고, 목욕탕에 들어가 머리를 감고 나면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간 듯 늘어져버려요. 일기를 쓰지 않은 날은, 그 부분만이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아요.”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 날들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결국 그것은 그녀가 스스로 호흡하지 않고, 자신의 모습으로 살지 않았다는 것이리라. 일기를 쓰지 않게 된 것은 단지 피곤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모습으로 살지 않았기에 ‘기록해야 하는 자신의 모습이 없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156쪽
어릴 적 친구, 거리에서 만난 정신과 의사, 시골에서 상경한 친구 딸내미, 책을 보고 연락한 석유회사 직원. 죽음과 사랑이 있어 극적이기도 하고, 죽음도 사랑도 없어 심심하게 들릴 수도 있는 사람과 이야기. 이야기 꼭지마다 컬러 사진 하나가 두 쪽으로 담겨 있다.
사실 정혜윤 씨의 서평을 보고 책을 읽게 됐다. 그 서평에 소개된 일화 역시 무척 흥미롭다. 관심 있는 분들은 정혜윤 씨 서평을 읽어 보시기 바라고.
읽는 동안, 읽고 나서, 다짐했다. 좀 더 뻔뻔해지자. 무턱대고 묻자. 판단은 미루고 그냥 듣자. 사람이란 이토록 풍성한 이야깃거리의 보고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