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우리들의오래된동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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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정준호 (후마니타스,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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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재밌다. 정말 재밌다. 기생충에 대한 거의 모든 것에 더해 기생충과 관계 있는 인간의 거의 모든 것까지 담고 있다. 자세한 생물학적 분석은 기생충학 교재를 찾아보면 될 일이고. 2011년 문지문화원 ‘사이’와 한겨레신문사의 과학웹진 ‘사이언스 온’이 공동기획한 제3회 ‘올해의 과학책'으로 뽑혔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어 기록해 두었었다. 
내 느낌상 이 책은 출판사와 편집자의 공헌이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긴 집필 시간도 그렇지만, 저자 후기에서 직접 밝히듯 출판사를 통해 여러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며 자신의 관점과 시야가 많이 바뀌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아프리카 현지에서 기생충을 연구하며 사람들을 치료하는 기생충학자이자 의사이다. 내가 아는 기생충학자로서 두 번째이다(첫 번째는 그 유명한 경향신문 칼럼니스트 서민 씨다).
읽다 보면 전혀 몰랐던 사실로 가득하다. 인문학적 글쓰기에 도움 될 만한 아이디어로 무궁무진할 것이다. 근데 이걸 다 직접 적어서 기록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난감했다. 인문학으로 이어 쓰기 좋을 만한 부분만 우선 발췌했고 훗날 필요하면 사서 소장할 생각이다. 컬러로 된 기생충 사진도 책 곳곳에 실려 있어 가지고 있을 만한 가치는 아주 충분하다. 기생충 이름과 생물학 단어들을 책 말미에 따로 정리해서 설명해주고 있다. 기생충과 인류의 역사, 근대 이후 식민지 정복과 개척이 진행되며 인류 전체에 기생충이 어느 정도로 폭발적인 힘을 가했는지까지, 그것까지도 다 적었다. 이건 정말 80~90프로 이상 출판사와 편집자의 노력 아닐까 싶다. 우왕 우왕.

태초에 무기물이 곤죽이 되어 부글거리던 원시 바다가 있었다. 여기서 최초의 자가 복제 물질이 탄생했다. RNA 혹은 DNA라 불리는 이 물질의 발생은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첫 신호였다. 
주어진 환경에서 모두가 억척스레 살아가던 도중, 발상의 전환을 일으킨 생명체들이 나타났다. 바로 기생충이었다. 이들은 환경을 개척하거나 제한된 자원을 두고 경쟁하기보다는 아예 다른 경쟁자들의 몸 안에 들어가 그들이 획득하는 물질을 고스란히 가로채기로 했다. 기생은 혁명이었다. 이제 지구상에 기생충 하나쯤 없는 생물은 없다. 세상을 뒤덮은 기생충은 진화를 주도했고, 성을 탄생시켰으며, 사회를 형성했고, 행동을 변화시켰으며, 궁극적으로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해주었다. 
우리 염색체 안의 쓰레기 유전자들도 일종의 숙주 유전자에 달라붙은 기생 유전자들이다. 이들은 평소에 유전자로서 발현하지 않지만 급격한 환경의 변화 같은 상황에서 생존율을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우리 세포 안 엽록소와 미토콘드리아도 그렇다. 이들은 본래 세포 외부에 살던 독립 생물들이다. 그러나 어떤 계기에 의해 다른 세포 안에 들어가게 되었고, 소화되지 않은 채 서로 공생 관계를 이루면서 하나의 생물이 되고, 세포 내 소기관이 된 것이다. 이를 ‘세포 내 공생설’이라고 하는데, 엽록체와 미토콘드리아가 처음 세포 내로 들어가게 된 계기가 바로 기생 생활 때문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다. 
포유동물에는 한 종이 평균 약 두 종의 촌충, 두 종의 흡충, 네 종의 선충, 한 종의 구두충이 기생한다. 조류의 경우에는 한 종이 평균 약 세 종의 촌충, 두 종의 흡충, 세 종의 선충, 한 종의 구두충이 기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생명체당 적어도 8~9종의 기생충은 있는 셈이다. 여기서 말한 기생충들은 현미경 없이도 쉽게 관찰할 수 있는 큰 다세포 기생충만을 헤아린 것이고, 만약 혈액에 기생하는 단세포 기생충이나 바이러스, 박테리아 등을 합치면 십 수 종은 가뿐히 넘는다. 31쪽

: 인간의 경우 
잠은 에너지 보존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보다 면역계와 백혈구가 활성화되고 체내 기생충의 감소에 효과가 있다. 
 
위생 가설 : 알레르기나 천식, 아토피성 피부염 같은 자가면역질환들은 우리 몸의 면역계가 주변의 무해한 물질에도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면서 염증이 일어나는 현상을 말한다. 지난 수십 년 사이에 이런 질병들이, 장내기생충을 찾아보기 힘든 선진국이나 도심지에서 특히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학자들은 생각했다. 자가면역질환들이 증가하기 시작한 시점은 장내기생충 박멸이 완료된 시점과 겹친다. 장내기생충은 염증 반응과 관련된 면역 반응을 조절하는 능력이 있다. 이 관계는 우연일 뿐일까? 이렇게 탄생한 이론이 위생 가설이다. 인간이 지나치게 위생적인 환경에 살게 되면서 면역계를 조절해 주던 장내기생충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면서 어느 정도 노출되어야 하는 기생충과 미생물들에 충분히 노출되지 않기 때문에 면역계가 모든 것에 과민 반응을 한다는 내용이다. 위생 가설에 기초한 다양한 시도들은 지금까지 불치, 혹은 난치성으로 분류되던 자가면역질환에 상당한 효과를 보이고 있다. 
 
옷은 벌거벗은 원숭이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치더라도, 애초에 왜 인간이 벌거벗게 되었는가는 여전히 많은 논란을 낳고 있다. 기생충학의 입장에서는 체외 기생충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털을 잃게 되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인간이 털 없이도 추위와 위험을 피할 만한 지능과 손재주를 갖게 되고, 부속품을 충분히 이용할 만한 여유가 있는 상황에서 체외 기생충의 온상이 되는 털을 고집할 이유는 없다. 뿐만 아니라 털이 없다는 형질은 체외 기생충이 적다는 광고와도 같으므로 짝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도 효과적인 과시 수단이 될 수 있었다. 261~262쪽
 
붉은 여왕 가설 : 자손의 숫자로만 비교해 보자면 유성생식은 무성생식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붉은 여왕 가설은 유성생식이 숙주가 기생충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별한 방어기제라는 설명을 내놓는다. 숙주의 생존 기회는 기생충에 대항해 얼마나 효과적인 방어책을 구축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유성생식이 가져다주는 이점은 무성생식에 비해 더 큰 유전적 다양성을 생산해 낼 수 있다는 점이다. 
 
많은 기생충들은 자웅동체이거나 무성생식을 한다. 숙주의 몸안에 자리 잡은 기생충이 짝을 찾아 멀리 떠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주혈흡충은 암수가 분리되었다. 주혈흡충의 가까운 친척이나 조상들을 살펴보면 자웅동체다. 주혈흡충이 자웅동체에서 암수로 갈라지게 된 이유는, 숙주가 유성생식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같다. 암수 분리를 통해 숙주의 복잡하고 강력한 면역계에 발맞추어 진화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숙주는 기생충에 대항해 성을 개발했고, 기생충은 숙주를 따라 잡기 위해 암수가 갈라진 셈이다. 주혈흡충은 숙주의 혈관에 기생하기 때문에 다른 기생충에 비해 면역계에 쉽게 노출된다. 따라서 그에 대항할 유전적 변이도가 높아야 했고, 그러려면 무성생식보다는 유성생식이 장점이 많다. 
‘가사 분담’ 때문이라는 가설도 있다. 수컷은 암컷을 안고 혈류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도록 근육이 발달했고, 암컷은 알을 낳기 좋게 근육을 없애고 가느다랗게 변했다. 암수가 분리되어 수컷은 암컷의 운반자로, 암컷은 알 생산 공장으로 특화되어 서로를 보완해 준다. 가사 분담을 통해 분업화가 가능해지면서 더욱 성공적인 기생충이 된 셈이다. 
생물들에서 일부일처제가 발생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암컷이 듬성듬성 분포하고 있거나, 부모 모두가 자식을 양육해야 하는 경우다. 암컷이 넓은 지역에 듬성듬성 분포하는 경우, 수컷이 일정한 지역을 확보하면서 여러 암컷을 거느리기는 불가능하다. 지나치게 넓은 지역을 관리하느라 에너지를 소모하느니 한 암컷에 정착하는 방식이 이득이다. 양육 역시 중요한 부분인데 조류처럼 쉼 없이 알을 품어야 하는 경우에는 암컷과 수컷 모두가 자녀의 양육에 참여해야 한다. 주혈흡충은 여기에 모두 해당되지 않는다. 268~269쪽

똥 이야기도 인상 깊다. 개나 고양이, 새들이 짝짓기 상대방의 항문 주위를 핥거나 냄새 맡는 이유도 기생충 때문일 가능성이 많댄다. 항문 주위가 찌꺼기로 지저분할 경우 체내기생충은 당연히 많을 것이다. 더 건강한 자손을 낳는 데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이야기다. 기생 말벌을 피하기 위해 은색알락팔랑나비 애벌레는 '배설물 발사' 능력을 특화시켰다. 지금까지 관찰한 결과로는 수 센티미터에 불과한 애벌레가 초속 1.3미터로 자기 몸의 40배에 달하는 거리인 153센티미터까지 대변을 날려 보낸 기록이 있단다. 저자는 사람의 경우로 친절하게 계산해준다. 순수하게 항문의 힘만으로 약 70미터 거리에 대변을 날려 보내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허이구야.
생물학 참 재밌다. 코끼리에 대한 책도 하나 빌려 두었는데 다 읽지 못해서 일단 반납한다. 다음 번엔 꼭 읽어 봐야지. 참, 저자 블로그에 들어가면 참고 서적을 비롯한 다양한 글을 읽어볼 수 있다. 

 
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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