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만 보면 스피노자가 라이프니츠를 몰래 만났다는 뜻 같다. 사실은 정반대에 가깝다. 라이프니츠가 스피노자를 몰래 만났다. 제목을 저리 지은 이유는 ‘스피노자’를 맨 앞에 두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오늘날 라이프니츠보다 스피노자의 철학이 더 설득력 있고 매력적이다. 라이프니츠 본인도 그렇게 생각했다. 스피노자를 만난 1676년 11월 이후로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은 대개 스피노자를 극복하려는 목적으로 고안되었다. 영어판 원제는 The Courtier and the Heretic, 직역하면 <궁정 대신과 이단자> 정도가 되겠다.

사서 가지고 있을 만한 책이다(나는 지금 인터넷 서점에서 이 책을 구매하려는 충동을 참고 있는 중이다. 이음이나 홍익에 가서 사야 해, 스스로를 타이른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17세기 후반에 동시대를 살았고, 1676년 11월의 어느 날 스피노자의 집에서 며칠 동안 대화를 나누기까지 했던, 개인의 인품과 삶의 이력으로 보자면 두 극단의 대변인이라고 할 수 있을, 두 철학자의 생애와 그들의 철학을 이만큼 쉽고 흥미롭게 기술한 책은 내가 기억하는 한 없다. 이 책은 각자의 철학에 대한 훌륭한 입문서이다. 또한 17-18세기, 중세와 근대 사이의 과도기이자 변환기였던 시대로 들어서는 철학적 입문서로 손색이 없다. 두 철학자 개인의 삶에 접근하기 위한 평전으로도 어울린다.

스피노자 철학이 더 궁금해졌다. 책장에 꽂힌 <서양근대철학>(창비)를 집어 들었다. 스피노자 부분을 펼쳤다. 모두 30쪽 남짓 되는 짧은 요약문이다. 거역할 수 없는 힘에 굴복하고 말았다. 졸았다. 이제 좀 스피노자를 안다고 생각했는데. 문제는 철학 개념어였다. <스피노자는 왜 라이프니츠를 몰래 만났나>는 개념어를 쓰지 않으려 노력하고 또 풀어서 설명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입문서이고 교양서이지 학문적으로 엄격한 철학서는 아니다. 그러므로 사유하는 힘, 철학하는 능력을 길러준다고 보긴 힘들다. 철학을 전공한 친구의 말로는 스피노자의 현대적 해석을 잘 반영하고 있는 좋은 책인 것 같단다. 하지만 철학사에 관한 어느 정도의 배경 지식, 철학과 스스로의 삶을 연관 지어 성찰하는 지적 능력(혹은 의지)를 갖추지 않은 사람이라면 대체 어디가 재미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책을 읽으면서, 다 읽고 나서, 스피노자의 신-자연과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를 이해했다. 적어도 그들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그 말을 함으로써 무엇을 이루려고 했는지, 그 말을 하는 동안 그들이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는 알 것 같았다. 전적으로 쉽고 풍성한 설명 덕택이다.

내 삶에 와 닿은 무엇도 있었다. 나의 경험과 연관 지어 생각하는 어떤 순간이 있었다. 아래 발췌문을 보면 알 수 있듯,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과 20세기 중반 이후의 철학자들은 대체로 라이프니츠적이다. 그들은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세계 너머(아래)에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나의 지난 20대 대부분의 기간 동안 만났던 사람들도 사실 ‘라이프니츠’적이었던 것 같다. 정의와 선함, 자비의 원리가 세계를 지배해주길 바라는 마음은 그 크기는 다를지언정 모두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 같다. 보편타당한 선과 악의 기준은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세상엔 나쁜 놈들이 너무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선하다, 나는 정의로움에 동참하고 있다는 믿음도 필요했다. 인류를 걱정했다. 사회가 나아지기를, 인간은 바뀔 수 있다고 믿었다. 이 모든 마음들은 모두 라이프니츠 안에도 있었다. 그의 형이상학은 이 마음들로부터 시작되어 (그에게는 보기 드문) 일관성을 가지고 나아갔다.

그렇다면 스피노자는 우리 보고 대체 어떻게 살라는 거야? 책을 다 읽고 났을 때, 이게 나의 의문이었다. 스피노자는 나(우리)에게 어떤 윤리를 주장하고 있는가. 관련 부분을 다시 읽었다.

스피노자는 매우 정치적인 사람이었다. 전 유럽이 스피노자를 증오했다. 그는 20대 초반 이미 유대교 공동체에서 ‘파문’당했던 전력이 있다. 그는 신이 다스리는 기독교 왕정 국가가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던 시대에, 근대적인 자유주의 공화국을 주장하며 기독교의 신을 폐물 취급했다. 동시에 스피노자는 개인이 행복과 구원에 다다를 수 있는 길을 찾아내고자 했다. 그는 사회와 인류를 구하겠다는 자비로운 마음은 말하지 않는다. 책은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어떤 사람이 최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과 최선의 이익을 얻는 것은 별개의 일임을 인정한다. 모름지기 인간이란 자기에게 반하는 외부의 힘 앞에서 한없이 약한 존재이며, 가장 이성적인 사람들조차 실은 희망과 공포의 대상이 대개는 자신들의 통제 밖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성의 인도가 제공하는 두 번째 공헌은 우리로 하여금 사물의 내적인 필연성을 이해하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통제력을 행사할 수 없는 인간 경험의 광범위한 영역 안에서 불행에 이르는 일이 없도록 가르쳐준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해하는 한, 우리는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욕구할 수 없으며, 오로지 진리 안에서만 만족을 찾을 수 있다.”고 적었을 때, 스피노자는 최소한 고대 스토아학파의 시대 이래로 철학이라는 바로 그 이름과 결부되어 온 이른바 묵인이라는 고전적 정서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통제 범위 밖에 있는 사건들을 향한 올바른 철학적 태도를 기술할 때, 그는 ‘체념’이나 ‘무관심’ 같은 용어 대신, 오히려 ‘욕구’나 ‘만족’같은 단어들을 채택한다. 그가 채택한 자세는 ‘숙명론’이 아니라 니체가 ‘amor fati' 즉 운명애라고 명명했던 것에 더 가까운 무엇이었다.”

스피노자 본인이 자신의 삶 전체로 보여준 바와 같이, 철학하는 마음의 삶을 사는 것.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이 ‘자신들의 통제 밖’에 있음을 깨닫고, 이성의 인도에 따라 ‘우리가 통제력을 행사할 수 없는 인간 경험의 광범위한 영역 안에서 불행에 이르는 일이 없도록’ 살아가야 한다고 충고한다. 거기에 더 나아가 우리 자신의 이성으로 철학하는 삶을, ‘신(자연)’을 직관으로 탐구하고 아는 삶이 우리 자신의 가장 자유로우며 가장 행복한 삶이라고 했다. 스피노자는 우리를 둘러싼 관계와 타자에 대해서는 조언하지 않는 것 같다. 그의 형이상학 자체가 그런 여지를 포함하지 않는 듯하다. 예전의 나는 매우 라이프니츠적이었다. 지금의 나는 스피노자에 기울어 있다. 

많은 욕심 내지 않기로 했다. 살면서 언젠가 <에티카>를 읽을 일은, 없을 것 같다. 노트 한 권 옆에 두고 그 지난한 독서를 밀고 나갈 시간에 차라리 좋은 입문서나 교양서 두세 권을 읽기로 했다. 더 구체적이고 더 엄밀해야 하는 부분은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된다. 친구는 그러라고 있다. 모르겠으면 계속 물어보고 그래도 모르겠으면 나 좀 가르쳐 달라고 떼쓰기로 했다. 난 그래도 된다. 이유는 비밀이다.

시간이 모자라 스피노자 철학만 책을 토대로 요약해 보았다. 그리고 책 전반에 걸쳐 통찰력 있는 대목을 발췌했다. 두 문서가 각각 A4 네 장씩이다. 이걸 전부 블로그에 올리는 건 부질없는 일 같다. 필요하신 분은 댓글이나 방명록으로 말씀 주시면 얼마든지 드릴 수 있다. 다만 발췌문은, 워낙 멋진 문장이 많아 ‘더 보기’ 형태로 아래에 달아 놓겠다. 마음대로 하시고.

올해 읽은 첫 철학책인 것 같은데, 정말 잘한 일이다. 책을 추천해준 ㄴㅍ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철학에 대한 의욕과 호기심이 부쩍 급상승했다. 이 추세를 이어나가야 한다. 레비나스 입문서로 이 에너지를 이어나가고 싶은데 잘 될지 모르겠다. 혼자 하면 영 재미가 없으니 말이다.

스피노자는왜라이프니츠를몰래만났나
카테고리 인문 > 철학
지은이 매튜 스튜어트 (교양인,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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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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