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봄 서점에 갈 적마다 과학 매대에서 보며 탐냈던 책이다. 아마 부키 출판사의 <아까운 책 2012>에서, 정혜윤 씨의 추천 글을 보고 처음 마음이 동했을 거다. 어마어마하게 훌륭한 책이어서 이걸 어떻게 정리해야 하나 골치가 아프다.
일단 만화다. 철학자이자 논리학자, 평화운동가였던 영국인 버트런드 러셀의 생애를 그린다. 그의 생애는 매우 흥미로운 요소가 다분하고, 또 그는 수학과 논리학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겼기 때문에, 이 모두를 담는다면 한 권의 만화책으로는 턱이 없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광기'와 '논리(학)'이라는 화두를 키 삼아 러셀의 생애를 따라간다.
러셀을 포함해 20세기 초반의 논리학자들과 수학자들은 '수학의 토대' - 아마도 세계, 사실, 진리, 인식을 모두 포함하는 - 를 찾고자 했다. 수학에는 모두가 자명한 것으로 인정하는 '공리'란 것이 있는데, 이것마저 증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920년대 초, 다비트 힐베르트가 선언한 구호(힐베르트 프로그램).
1. "우리는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라는 말은 수학에 결코 없다.
2. 우리는 알아야 하고, 알게 될 것이다.
근대성의 위대한 본질, 이성을 통해 세계를 설명할 수 있다는 마음. 논리학자들은 그 마음을 끝까지 밀고 나가려고 했던 사람들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설명은 '증명'되어야 하는 것이었고, 그 설명의 방식(혹은 방법론)으로 선택한 것이 수학이자 논리학이다, 라고 말해도 되려나. 러셀이 쓴 <행복의 정복>(1930)을 읽어 보면 아 이 사람은 행복마저 이런 식으로, '정복'할 수 있는 것으로, 획득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겼다는 점을 알 수 있다.(하지만 2차 대전을 겪으며, 이 책의 표지에 나오기도 하는 두 번째 부인 도라와의 결혼 생활도, 자녀들의 삶도 파국을 맞는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오늘날 한국의 인문학 독자들 대부분은(나를 포함해서), 그냥 다들 '직관'과 '통찰'의 신도들 아닐까. 그럴싸한 말들, 직관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알쏭달쏭한 단어에 열광하는 사람들. 아주 가끔 소설을 기피하는 사람들을 만나곤 한다. 그들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거짓말(소설)을 근거 삼아 현실의 삶을 토론하고, 논의하고, 합의할 수는 없으니까. 어쨌든 소설은 인간이란 도무지 알 수 없다거나, 특정 상황에선 이토록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라는 이야기를, 허구(거짓)의 세계 위에서 그리니까. 본래 인간이 그토록 불확실하다 해도, 보편된 속성으로서의 이성적 능력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인간과 인간이 서로 대화하며 공통의 문제를 함께 결정한다는 것은 헛소리에 불과하지 않을까. 문학의 정반대에 서 있는 것은, 내 생각엔 사회과학인 것 같다. 방법론, 이미 규정된 형식에 따른 논증, 도출되는 결론, 새롭게 탄생하는 세계에 대한 또 하나의 '설명'. 일 년 전까지만 해도 말랑말랑한 소설-산문 독자였던 나는 사회과학의 세계에 한창 눈을 뜨는 중이고, 나의 무식을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다.
이 만화는 서사로 진행되기 때문에 흥미롭게,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다. 본문 속에서 중요한 개념은 친절히 설명해주기도 한다. 무한, 집합 같은 개념이 수학과 논리학에 미친 영향 같은 것들 말이다. 뭐 자세한 내용은 사실 거의 이해하지 못 했다고 보면 된다. 아, 급 후회가 밀려온다. 한 번 더 읽고 쓸껄. 아이 참. 투덜투덜. 예를 들어 이런 대목. 이 글을 쓰기 전 책을 훑어보다 이 대목을 다시 읽었다. 제대로 이해하는 데 한 30분은 걸린 것 같다.(이미 한 번 봤는데도!)
이제 모두를 아우르는 이 집합의 원소들이 지닐 수 있는 속성으로 '자기포함'이라는 속성, 즉 '자기 자신을 원소로 지님'이라는 속성을 정의해보자. 예컨대 모든 집합들의 집합은 그 자신이 집합이므로 자기포함 속성을 지니는 반면에, 모든 수들의 집합은 그 자신이 수가 아니므로 자기포함 속성을 지니지 않는다. 우리는 자기포함 속성을 이용해 '자기 자신을 원소로 지니지 않은 모든 집합들의 집합'을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집합에 대해 "이 집합은 자기 자신을 원소로 지니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 이 질문에 대답해보자. 만일 그 집합이 자기 자신을 원소로 지닌다면, 그 집합은 자기 자신을 원소로 지니지 않은 집합이므로(왜냐하면 그 집합의 원소는 '자기 자신을 원소로 지니지 않음'이라는 속성을 지니기 때문) 그 집합은 자기 자신을 원소로 지닐 수 없다. 만일 그 집합이 자기 자신을 원소로 지니지 않는다면, 그 집합은 '자기 자신을 원소로 지니지 않음'이라는 속성을 지니므로 그 집합의 원소이다. 따라서 그 집합은 자기 자신을 원소로 지닌다. 이와 같은 역설 상황을 일컬어 '러셀의 역설'이라고 한다. (...) "나는 지금 여러분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라는 에우불리데스의 문장처럼 자기 자신을 언급하는 문장들과 관련이 있다는 판단에 말이다. 326쪽, 주요 등장인물과 개념 설명
러셀을 비롯한 논리학자들은, 끝없이 깊은 불안과, '토대'를 잃고 말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품고 살았다. 그 불안과 두려움이 많은 논리학자들로 하여금 광기 근처를 서성거리게 만들었다. 모두 다 지독하게 똑똑한 사람들일 텐데, 내가 그만큼 똑똑하지 않다는 것에 새삼 감사하는 마음도 든다.
그러니까 이 책은... 논리, 이성, 합리, 증명 같은 것으로는 삶과 세계를 완벽히 설명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시종일관 그렇다. 세상사도 그러하고 우리 삶도 그러하다. 이성 같은 것으로는 도저히 해결될 수 없는 무언가가 내면에 자리하고 있다고 말해도 되겠고.
이거이거 쓰다 보니 새삼, 이 책 참 대단한 책이구나, 러셀의 삶 또한 그러하구나 싶다. 사서 읽길 잘했다. 책장에 고이 모셔놓고 다시 만날 날이 있기를 기대하며.
로지코믹스
- 저자
-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 지음
- 출판사
- 랜덤하우스 | 2011-02-14 출간
- 카테고리
- 과학
- 책소개
- 버트런드 러셀의 삶을 통해 보는 수학의 원리!『로지코믹스』는 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