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독서모임에서 추천받은 책. 이전부터 제목이 참 섹시하다고 생각했었다. 

모두 5개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을 읽을 땐 아 이 책 빌려 읽길 참 잘했다, 고 생각했다. 2,3,4장은 꽤 흥미로웠지만 경어체가 내내 거슬렸다. 5장에 가서는 뭐 그리 참신할 것 없는 이야기. 책 제목은 한 싯구에서 인용한 글귀라는데, 어쨌든 참 잘 지었다. 이 책이 나름 많이 팔린 데는 팔십 프로 이상 제목 덕이라고 생각한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1장까지만 해도 책, 책 읽기, 읽기에 대한 페티시즘 혹은 광적인 예찬론이나 다를 바 없다고 느꼈다. 앞뒤 없이 막무가내로 그저 우리는 책이란 것을 제대로 읽을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또한 미치지 않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그저 반복한다, 읽고 또 읽는다 어쩌구저쩌구. 스스로를 독서라가 이름 붙이기 좋아하는, 또 실제로 책으로부터 물성 이상의 쾌락을 얻는 변태들은 그런 담론에서 자기만족을 느낀다. 나도 크게 다르지 않다. 


책이라는 것은 한 장의 종이를 여러 번 접고 재단하여 만듭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이 접어 '책'이 되면, 급하게 한 자으이 종이로 만든 문서나 두 장으로 접어서 펼친 서류와 달리 몇 번 읽어도 알 수 없게 됩니다. 몇 번 읽어도, 몇 번 눈을 집중해도 모든 지식을 자기 것으로 했다는 확신이 별안간 완전히 사라져버립니다. 신기한 일입니다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반복합니다. 책은 읽을 수 없습니다. 읽을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책'으로 만들자마자 몇 번 읽어도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런 책만이 책입니다. 79쪽


여기서 그치고 말았으면 정말 책을 집어던졌을 텐데, 사실 본론은 이게 아니다. 

세계, 사회는 질서를 필요로 한다. 원칙, 규칙 같은 것으로 떠받쳐져야 한다. 질서, 원칙, 규칙 같은 것은 곧 텍스트이다. 글이다. 근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근거는 기록된 것이다. 기록은 글로만 이루어진다. 루터는 세계(실은 사회)의 준거를 텍스트(성경)에서 찾으려 했던 인간이다. 세계를 구성하는 새로운 텍스트를 만들어내려 했던 인간. 그러므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낸 인간. 즉 '혁명'한 인간.  


하지만 16세기에 일어난 일을 상업혁명으로 부른다면, 이는 12세기 상업혁명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반복합니다만, 12세기 상업혁명은 역시 법의 정비 없이, 아니 '법의 혁명', 즉 중세 해석자 혁명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이는 강조해야 할 논점입니다. 174쪽


교회란 그리스도교 사회 전체를 말하고, 교회법이란 그 사회 전체를 통괄하는 법이었다는 이야기는 앞에서도 했습니다. 로마법을 주입받아 고쳐 쓰인 교회법의 텍스트는 절대적으로 자기를 갱신하고, 대사되고, 체계를 이루고, 다른 '법의 집성'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이를 '중세 해석자 혁명'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이 혁명의 과실인 새로운 법을 주축으로 한 '유럽 전체를 통일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 즉 '교회'가 성립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근대국가의 원형이 되는 겁니다. 181쪽


근대국가의 원형은 이 중세 해석자 혁명에서 성립한 중세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있습니다. 교황이 바로 최초의 주권자입니다. 물론 교황은 선거에 의해 뽑히고 법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자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선거에 의한 주권자의 선출, 그리고 법에 의한 주권자의 구속, 이런 생각도 당연히 이 혁명에서 유래합니다. 교황 선거, 이른바 '콘클라베'가 실시된 것은 13세기가 되고 나서인데, 12세기의 법적 사고 없이는 이런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190쪽


재판에서는 명시할 수 있는 증거를 제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이전에 무엇이 정당한 증거로 인정되는가를 정의하는 것도 법률입니다. 게다가 재판에서는 어떤 법문을 준거로 할 것인지도 명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무슨 법률의 어떤 조문을 근거로 한다는 것을요. '준거를 명시한다'는 실증주의의 근본적인 태도는 중세 해석자 혁명에서 온 것입니다. ......

12세기 혁명으로 가능해진 실증주의의 영향은 역사학에서 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컨대 이때 다른 분야에서 구별되어 전문적으로 체계화되고 정련되어 강철처럼 강인해진 '법학'이야말로 유럽의 첫 '과학'이었습니다. 이는 모든 과학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193쪽


중세 해석자 혁명에 의해 초래된 단절은 여기에 관련된 것입니다. 텍스트가 문서가 됩니다. 텍스트는 정보의 그릇이 됩니다. 정보만이 법이나 통치, 그리고 규범과 관련된 것이 됩니다. 이미 법은 노래할 수 없고, 법은 춤출 수 없고, 법은 걸칠 수 없게 됩니다. 법은 마실 수 없게 되고, 법은 연주할 수 없게 되고, 법은 운을 맞출 수 없게 됩니다. 1세기 걸려서 결국 우리의 이 세계가 도래한 것입니다. 우리의 세계,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며 중립적이고 보편적이며 기호화할 수 있는, 즉 데이터화할 수 있는 세계, 데이터베이스화할 수 있는 세계. 텍스트는 줄여짐으로써 결정적으로 효율화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정보와 서류의 세계, 효율과 생산성의 세계가 여기에 도래한 것입니다. 정보의 세계, 데이터베이스의 세계, 검색의 세계가. ......

중세 해석자 혁명은 무엇이 '텍스트'인지를 정의하는 혁명이었습니다. ...... 206~207쪽


구구절절 적자니 시간 없다. 이 책의 판매량을 보고 나와 독서모임의 친구들 모두 놀랐다. 아니 왜 이렇게 많이 팔렸을까? 이내 나는 음모론으로 생각이 미쳤다. 얼마 전 자음과모음은 사재기 행위 의혹에 휩싸였다.(그치만 출판계의 사재기 행위란 것이 웬만하면 적발되지 않는 편인데, 자신있게 "발견했다"고 하니, 사실이 틀림없어 보인다. http://kr.news.yahoo.com/service/news/shellview.htm?linkid=33&fid=581&articleid=2012031618254920380)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로 요즘 부쩍 '핫'한 출판사다. 독서모임에서 만난 출판 디자이너에게 들은 바로는 이 하이브리드 총서를 워크룸에서 작업했다고 한다. 하지만 회사 사장에 대한 말들이 많고, 오래전 믿기 힘든 사건도 일어난 곳이다. 그 핫한 책들, 편집자들과 디자이너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하지만 이래서야, 이런 사건이 일어난 이상, 더 이상 출판사를 신뢰하기 힘들다. 편집자들이 무슨 잘못인가 싶다. 그렇게 멋진 책을 만들어낼 줄 아는 사람들인데. 어쨌든 음모론. 

2,3,4장의 논의는 위의 발췌문에서 보듯 매우 흥미로웠다. 관련 내용을 더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서술 방식이 어쩌면 전형적으로 일본적인 것 아닐까 싶었다. 이야기를 왜 하다 말어. 

강유원 씨의 <책과 세계>가 생각난다. 한 대목을 소개한다. 이렇다니까. 


책 자체가 아닌 세계, 즉 책이 놓인 공간 속에서 책의 의미를 살펴보면 '책을 읽어야 한다'는 언명의 비진리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책, 넓게 말해서 텍스트는 본래 세계라는 맥락에서 생겨났다. 즉, 세계가 텍스트에 앞서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했었다. 그런데 어느덧 텍스트는 세계를 거울처럼 반영한다는 거짓을 앞세워 자신에 앞서 있던 세계를 희롱하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터 텍스트는 그것 자체로 일정한 힘까지 가지게 되었다. 이 와중에 세계와 일치하는 점이 전혀 없는 텍스트도 생겨났다. 이것은 인간 의식의 분열인 동시에 세계의 분열이다. 결국 이것은 세계의 불행이며 그 세계 안에 살고 있는 인간의 불행이다. 3~5쪽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저자
사사키 아타루 지음
출판사
자음과모음 | 2012-05-18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읽고 쓰는 것이 바로 혁명이다!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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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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