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가 추천해주었던 소설. 커피집 시연에서 발견해 샀다. 내 책은 1992년에 인쇄된 초판본이다. 나온지 1년만에 27쇄를 찍어냈다. 뒤표지에 적힌 가격은 5,500원. '다섯수레'라는 출판사 이름을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분명 적지 않은 돈을 벌었을 것이다.
작은 글씨에 450여쪽 가까이 되는 분량이다. 분량만큼 작품이 담고 있는 내용 역시 거대하고 무겁다. 
에밀 아자르가 쓴 '가면의 생'에서, 주인공 파블로비치 에게 하느님은 말씀하신다. "
서사, 파블로비치, 서사적 작품을 쓰는 거야. '자아'는 지나치게 내면적이고 제한적이고 이내 고갈되고 말지. 작가에게 인간이란 주제의 광산, 명실상부한 금광이야." 그러자 파블로비치는 대답한다. "난 중국에 가서 살겠어요."
1933년 앙드레 지드가 쓴 '인간의 조건' 역시 중국을 배경으로 한다. 닥터 노먼 베쑨이라는 유럽 백인 남성까지도 참여했던 대장정, 1949년 건국, 1950년대의 대약진 운동, 1960년대의 문화대혁명 (위키피디아 '문화대혁명' http://ko.wikipedia.org/wiki/%EB%AC%B8%ED%99%94%EB%8C%80%ED%98%81%EB%AA%85)까지, 현대 중국의 역사는 퍼담아 올릴 인간의 고통으로 넘치는 풍성한(참 잔인한 표현이다) 서사의 우물이다. 뭐 한반도도 크게 다를 건 없겠으나 그 스케일, 박진감, 인간의 총량으로 비교할 때 중국은 단연 도드라진다. 에밀 아자르의 저 말 역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나 '인생'은 1950년대 이후 중국의 고통스러운 역사를 대다수 농민의 입장에서 그린 참신한 작품이었다. 다이 호우잉의 이 작품과 그 전 장편 '시인의 죽음'은 역사적 고통의 한복판에 있었던 도시민들, 특히 지식인들의 고통에 집중한다.

'문화대혁명'의 한 복판에 있었던 대학생들. 20여년이 지나 그들의 모습을 그린 소설이다. 이미 40대 초중반의 장년층이 되었다. 서로를 배신하고, 반대편에 붙고,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기회주의자들이 판을 치고, 사랑을 고백한 일기가 대중 앞에 공개되어 추방당했던 지옥같은 시절. 자연스럽게 밀란 쿤데라의 '농담'을 떠올리게 된다(리뷰 http://blog.naver.com/areudel/40060950271). 수 백명으로 들어찬 강당에서 자신을 추방하는 결정에 찬성한 수 백개의 손들. '농담'의 주인공 역시 한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한 편지들이 대중 앞에 낱낱이 까발려지는 것을 경험한다. 쿤데라의 농담은 1967년에 발표됐고, 다이 호우잉의 이 소설은 1980년에 발표됐다.
11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각각의 인물이 1인칭 화자가 되는 식으로 이야기가 이어진다. 손 유에와 호 젠후, 라는 두 인물의 시점이 비교적 잦다. 두 남녀의 애절하디 애절한 밀고 당기기가 중심적인 서사 라고 볼 수도 있지만, 가볍게 이야기하자면 그런 것이고, 두 사람이야말로 1965년의 지옥에서 가장 심하게 상처받았던 솔직한 영혼들이었다. 나머지 9명의 인물들도 마찬가지로 지옥의 불길에 마음에 화상을 입었지만 이에 대처하는 방식들은 다르다. 과거를 잊는 사람, 과거의 추락을 두려워하며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 등등. 
작품 속 인물들의 삶을 알아가는 과정이 힘겹고 괴로울 정도였지만, 동시에 이 작품은 걸작이다, 라고 생각했다. 특히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손 유에'. 그녀가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모습은 내 마음 속에 연민 이라는 감정을 피워올렸다. 그녀의 내면을 탁월하게 묘사한다. 작가 스스로 '인간에 대한 탐구'야말로 이 작품의 주제이며 자신이 관심을 갖는 주제라고 말하듯, 인간이 지옥을 경험하고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다. 이해할 수 없는 비극적 상황을 만들어낸 역사, 그 역사를 통과할 수 밖에 없는 인간, 결국 '역사'를 증오하거나 잊거나 포기하고 만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옥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아, 아, 사람아!'라는 제목에서 결국 찬탄의 가슴떨림을 느낄 수 있듯, 작품은 결국 굳은 '낙관', 인간에 대한 '믿음'을 이끌어낸다. 정치적으로 지극히 올바르다. 독자를 허무함에 빠뜨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두 주먹 불끈 쥐고 일어서게 만든다. 소설을 읽은 90년대 초반의 운동권들은 '격려'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대개 격려받을텐데, 내 경우에는, 이젠 역사와 인간과 관계, '나'를 제외한 거의 모든 것들에 회의적이게 되어버려서 그런지.
손 유에와 호 젠후의 안타까운 밀고 당기기를 지켜 보면서 '잘 됐 으 면 좋 겠 다!'라며 응원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식의 결합을 상상한 건 아니었다. 식상하다고 해야 할까. 난 솔직한 고백, 감동적인 눈물, 행복한 포옹 이런 걸 기대했다.
하여간 대작이다. 징글징글할 정도로.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역사는 결코 과거가 될 수 없어. 역사와 현실이 하나의 배를 공유하고 있어서 어느 누구도 떼어 낼 수가 없어. 그리고 그 배는 나의 미래까지도 삼켜 버리고 있는거야. 이닝, 난 분명히 설명하고 싶지만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난 이제 정말 진저리가 나!" (41쪽)
나도 곧잘 혼잣말을 한다. 그런 버릇이 언제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누구나 마음 속의 '자기'는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자기'와 또 하나의 '자기'가 늘상 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고독한 사람일수록 마음 속의 '자기'가 많다. 그것이 그 사람과 힘을 합해서 고독을 이겨 나가는 것이다. (119쪽)

사람아 아 사람아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다이허우잉 (다섯수레,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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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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