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야 하는 이유: 불안과 좌절을 넘어서는 생각의 힘 

강상중 지음 | 송태욱 옮김 | 사계절 | 2012년 


2013년을 맞이하는 힐링 도서로 고른 책. 딱히 우울하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다만 약간의 확실한 불안감이 있었다. 강상중 씨의 전작 <고민하는 힘>도 나쁘지 않았었다. 그사이 저자는 동일본 대지진과 원자력발전소의 폭발, 방사능 누출을 지켜봐야 했고, 신경과민으로 괴로워하던 아들의 죽음을 겪었다. 나는 살아가는 데 큰 불만이 없고, 앞으로도 허락되는 한 계속 살아갈 생각이지만, 그의 이유 역시 궁금하기도 했다.


현대 사회는 액상화하는 근대[각주:1]다. 액상화는 세계화로 급격히 전개되고 확대되었다. 그 결과 개인은 부수적 피해와 유사한 비상사태에 수시로 놓인다. 단적인 예가 동일본 대지진과 방사능 피해다.

현대 사회의 행복은 공통적인 내용으로 점점 수렴해왔다. 돈, 건강, 애정, 노후 같은 것. 행복의 합격 기준 같은 것이 선진국 사회에서 점차 형성되어 왔다. 하지만 이 기준을 충족할 수 있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불과 수십 년 전을 비교해보라. 사실상 행복의 합격 기준은 매우 높은 수준이라는 것, 여기서 하나의 불행이 만들어지고 있다. 일본의 경우 100만 명 이상의 우울증 환자, 연간 3만 명 이상의 자살자들이 있다. 액상화하는 근대의 부수적 피해를 체험하면서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행복의 합격 기준을 충족하기란 매우 힘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는다.

 

베버와 소세키의 개념을 빌어 현대 사회의 개인과 행복에 대해 살핀다. 저자는 라이프니츠의 변신론 개념에 주목한 베버의 설명을 전한다. 베버는 변신론을 윤리적 비합리성을 신의 섭리로 논증하려는 두 가지 입장, 행복의 변신론[각주:2]과 고난의 변신론으로 설명했다.  액상화한 근대의 부수적 피해들을 행복의 변신론은 설명할 수 없어 보인다. 오늘날 행복의 변신론의 자리를 자유경쟁의 규칙이 차지하고 있다. 이 규칙은 점점 더 적자생존의 잔인한 세계로 변모해가고 있다.

고난의 변신론은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라는 기독교적 가르침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세속화된 현대 사회에서 종교적 믿음은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신념으로 전락했다. 사회주의와 같은 이념은 세속화된 고난의 변신론의 형태로 등장하기도 했으나, 오늘날 우리의 일상 세계를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행복의 변신론이다.

 

“근대라는 시대에 이렇게까지 자의식이 돌출된 것은 왜일까요. 바로 ‘자유’라는 것이 우리의 기본 원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자의식이 한없이 비대해져 간 것입니다.” 50~51쪽

"‘고민하는 사람’(호모 파티엔스)이라는 인간 유형은 ‘세속화’된 근대라는 시대의 가장 본질적인 인간의 존재 방식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요." 62쪽

 

개인주의의 성장, 확산, 강화. 나는 오래전부터 비만한 자아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했었다. 스스로가 너무 생각이 많다고 생각했다. 남들처럼, 저기 저 강남의 청춘들처럼, 나도 별 생각없이 살면 안 되나. 왜 못 그러나. 나에 대해서, 주위의 시선에 대해서, 나의 삶에 대해서, 삶의 의의에 대해서, 너에 대해서, 나는 왜 이렇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나. 왜 생각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했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병이다. 병이야. 저자는 이것이 현대인의 일반적인 증상이라고 말한다. 비대한 자의식의 원인으로 근대 이후 사회의 구성 원리로 자유라는 개념이 등장했고, 그에 따라 개인이 탄생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신이 사라지고, 세계와 개인의 일체감이 불가능해진 시대. 틀리지 않은 말이다. 삶의 의의가 무엇인지, 나는 어떤 삶을 살면 되는지, 어떤 삶이 좋은 삶인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계시가 없는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힘들 법도 하다.(그러므로 아래 발췌문을 꼭 읽어보라.)


"인생의 의미가 무어냐는 질문에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답했다. "우리가 여기에 있는 까닭은 어느 유별난 물고기들이 특이한 지느러미 구조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 지느러미가 다리로 변해서 육상 생물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또 운석이 지구를 덮쳐서 공룡을 멸종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일이 없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포유류가 기회를 잡았기 때문이다. 또 여러 차례 빙하기를 거치면서도 지구가 단 한 번도 꽁꽁 언 적은 없기 때문이다. 또 25만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어느 작고 끈질긴 종이 생겨났고, 그들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지금까지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고차원적인 대답'을 갈구하지만, 사실 그런 답은 없다." ... 스토파드는 진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신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터무니없이 비상식적인 것 같다. 하지만 끈적끈적한 초록색 덩어리가 충분히 시간이 흐른 뒤에는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쓸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그 대안 명제에 비해서는 좀더 말이 되는 것 같다.'" 데이비드 실즈 지음, 김명남 옮김,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문학동네, 312~313쪽


저자는 진짜 자신을 찾으려는 마음이 근대적 현상이며, 개인으로서 스스로에게 충실하려 한다는 의미에서 한편 긍정적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현대 사회를 보듯 각종 신경증의 발병과 비대해진 자아에 지친 개인들이 전체 혹은 집단에 투신하는 전체주의의 등장이 우려스럽다고 말한다.

나는 이런 생각도 한다. 세계에 역행하고 때로 배반하는 텍스트를 접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저 별 생각없이 살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술 먹고 밥 먹고 섹스하고. 돈을 벌고. 가족을 꾸리고. 하지만 한편으로 저자의 말마따나 오늘날의 세계는 액상화하는 근대처럼 보이고,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위기가 지구 저편에서 짱돌처럼 날아오는 시대가 맞다(자본주의 등장 이후의 거의 모든 사회가 그렇긴 했다). 위기를 예측할 수 없고, 일상화되어 있고, 통제할 수 없다. 심지어 국가조차 위기를 통제하기가 쉽지 않다. 실존에 위기가 닥치면 개인의 내면은 매우 큰 상처를 입는다. 그 위기가 자신의 잘못에서 비롯되지 않았고 따라서 이해 혹은 납득이 불가능하기에 더더욱. IMF 경제위기가 닥쳤던 1998년의 한국이 충분히 잘 보여줬다. 

나는 다음의 설명이 더 설득력 있다고 생각한다. 전체 혹은 집단에 투신하려는 이들은 비대해진 자아에 지쳤다기보다, 본인이 납득할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위기를 가장 쉽게 설명하고 따라서 가장 쉽게 해결해줄 것 같은 이들을 지지하게 된다고. 실제로 나와 우리 가족의 실업과 빈곤은 나의 잘못이 아닌 것 같아 보이는데, 오히려 세상은 그렇지 않다고, 실은 네 잘못이고 네 가족의 잘못이라고 말하고, 납득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가운데 갈팡질팡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내 잘못 아냐, 유대인들 니들 잘못이야, 이주민들 니들 잘못이야, 그렇게 되는 거 아닐까. 

 

저자는 오늘날의 사회에 세 가지 고통의 씨앗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 문명화(합리화), 탈주술화와 그 연장선에서 발전한 경제 시스템. 둘째, 근대의 도래 이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연결이 끊어져 사람들이 흩어진 존재가 되었다는 것. 직접 접근형 사회의 등장. 어떤 매개도 사라진 상태란 곧 개인이 보고 듣는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이로써 역설적으로 개인은 타인 지향적 인간이 되어간다. 셋째, 공공 영역의 왜곡. 정치적 공간의 축소, 가치가 줄어듦. 익명의 불특정 다수의 자유의사가 민주적인 총의를 결정하게 된다는 것, 즉 시장이 정치를 움직이고 있다. 또한 "시장경제는 인간, 자연, 화폐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실 이 세 가지는 상품이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라는 점에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핵심적인 문제가 존재한다."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상품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 팔리고 있다. 심지어 인신매매도 인도를 비롯해, 아직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왜 상품이어서는 안 되는지 우리는 직관적으로 경험적으로 잘 안다.(그러나 직관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 그런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줄 알아야 한다. 직관으로 설득할 수는 없는 거거든.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고, 그것이 최선의 의사소통 구조임에 동의하는 한, 타인을 대화로 설득하는 방식으로 합의에 다다라야 한다.) 

 

"베버 시대의 독일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뒤의 혼란 속에서 시대를 바꿔 보려는 젊은이들의 물결이 일었습니다. 그런데 베버는 그것을 ‘카니발’이라 갈파했습니다.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나 카를 리프크네히트 같은 사람들을 ‘이런 놀이를 하면 반드시 반동의 시대가 온다는 걸 모르는가’ 하며 철저하게 깎아내렸습니다. 베버는 낭만주의적 반항은 결국 자본주의의 반석에 부딪혀 분쇄될 뿐임을 간파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됩니다." 102쪽


참 너무 멋진 말. 4년 전까지 나는 실제로 잘 알지도 못하는 베버라는 학자를 싫어했고, 그의 학문이 별 쓸데도 없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졸업 학기 때 짧게나마 살펴보며 나는 그의 시선과 문제의식에 적극적으로 공감했다. 위의 대목도 마찬가지다. 냉정한 시대 인식. 판단. 


“베버 역시 지의 합리화와 전문화에 의해 세계의 의미가 뿔뿔이 해체되어 가는 가운데 학문에 종사하는 사람이 가장 마음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지적 성실’이라고 했습니다.” 147~148쪽

"제가 이 책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런 낙관적 인생론이나 행복론을 체로 쳐서 비관론을 받아들이고 죽음이나 불행, 슬픔이나 고통, 비참한 사건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인생을 마음껏 살아가는 길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바로 “인간이 덧없이 죽을 운명에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어디까지나 겸허히 인간적인 것을 긍정한다”(테리 이글턴, <신을 옹호하다>)는 것입니다. 환갑을 넘기며 저는 이글턴이 말하는 이런 ‘비극적 휴머니즘’을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는 어딘가에서, 아마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뭐가 되어도 인간다운, 정직한 생활을 할 생각입니다”(<두자춘>)라는 말과도 통할 것입니다." 195쪽

 

거듭나기와 같은 개념은 실존적인 것이다. 실존에 관한 철학은 개인윤리의 영역에 속한다. 복수성이 인정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자유권의 경계를 벗어나지 않는 한 당신이 당신의 실존을 어떻게 다루든 누구도 침해할 수 없다. 하지만 점점 늘어나는 마음이 병든 자들은 자신의 실존을 버거워한다. 어떻게든 해소하고자 한다. 이해하고 해명하려 노력할 수도 있고, 자신을 파괴하거나 혹은 세계를 파괴하려 할 수도 있다. 

여기저기서 자꾸 성실함이라는 단어를 발견한다. 겸허히 인간적인 것을 긍정하며, 정직하게 그저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자주 듣게 된다. 세상이 어지럽긴 어지러운가보다. <페스트> 생각난다. 다시 읽어보고 싶다. 짬이 나려나. 




살아야 하는 이유

저자
강상중 지음
출판사
사계절 | 2012-11-0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고통을 껴안아라! 더 큰 삶의 힘을 얻을 수 있다!≪고민하는 힘...
가격비교




  1. 액상화하는 근대란 가볍고 불안정하며 통제가 불가능하고 국가 초월적인 권력과 불확실성이 존재하는 세계를 말한다. 그 이전의 근대는 고체적인 근대, 단단하고 안정적이며 예측과 통제가 가능하고 정치와 권력이 함께하는 세계를 뜻한다.(본문 19쪽의 각주) [본문으로]
  2. 행복의 변신론이란 행복의 조건이 차별적인 것은 신의 뜻에 따른 것이며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설명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권고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