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사회과학 - 사회과학자의 시선으로 새롭게 재구성한 5월 광주의 삶과 진실

최정운 지음 | 오월의봄 | 2012년 (1999년 초판 출간)


1999년 초판 발행 이후 오랫동안 절판되었다가 2012년에 개정판으로 출간되었다. 깔끔한 표지와 본문, 신국판보다 조금 작은 아름다운 판형, 당당히 제 역할하는 각주까지. 오탈자가 조금 눈에 띄기는 했지만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한 책이다. 물론 무엇보다 책의 내용이 다시 새로운 독자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반갑고 기쁘다. 


책을 읽으면서 트위터에다 이렇게 적었다. "최정운 선생의 <오월의 사회과학>을 한국 사회과학 연구의 전범이라고 부르고 싶지만 내 깜냥에 감히 그러지는 못하겠다. 그래서 그냥 전범 '중' 하나라고만. 감동적인 문장이 너무 많았다. 아니 무슨 사회과학서가 이러나. 한국 근현대사, 특히 80년대 이후의 사회과학 담론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감동하지 않을 리가 없을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과학에 관심이 있는 한국 독자들이 가장 먼저 읽었으면 하는 책으로 다시 한 번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함." 1985년에 출간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에서 있었던 일을 황석영 씨가 읽고 듣고 정리한 책이다. 취재기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르포르타주라고 볼 수는 없지만, 최정운 선생도 머리말에서 이 책을 읽고 난 독자들이 <오월의 사회과학>을 읽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위에 적었듯 머리를 때리는 문장이 너무 많아 옮겨 적는 데만 한 시간 가까이 걸렸다. 이걸 글로 다시 정리하자면 2시간은 더 걸릴 것 같다. 


이 책은 5.18에 대한 담론 분석으로 시작한다. "담론은 현실 이전의 힘, 폭력에 근거한 것이었고 다시 현실을 만드는 힘의 필수적인 수단이었다."(109쪽) 당시 신군부의 담론들 - 유언비어론, 폭도론 등과 그에 대항하는 광주 시민들의 담론 - 민주화론, 그리고 광주의 자식들 - 민중론과 혁명론, 민주화론 등, 을 살핀다. 전체 320쪽 중 1부가 100쪽 가까이 된다. 

담론은 사실 우리가 알 수 있는 모든 것이다. 당시 광주에 있었던 시민들은 자신들이 겪은 일을 말로 설명하지 못했다.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광주를 기억하고 광주를 알게 된 시민들은 도대체 5.18이 왜 일어났으며, 그곳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으며, 우리는 그 일을 왜 막지 못했으며, 앞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아야만 했다. 문학과 철학이 이 일에 덤벼들었지만, 사회과학이 바로 이런 일을 하기 위해 탄생한 학문이었다. "산 자가 죽은 자의 입으로 말하여 시신을 다시 찢어놓을 것이 아니라 산 자는 산 자의 입으로 말하고 죽은 자는 죽은 자의 입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듯 산 자와 죽은 자의 입을 가르고 대화하도록 하는 일에는 학문과 굿이 다를 바가 없다."(39~40쪽)


2부는 이 책의 핵심 주제이기도 한 '절대공동체'에 관한 것이다. 2부 1장의 제목은 바로 '말과 몸'이다. 1부의 맥락에서 연장선상에 있다. 이 책의 백미는 1부와 2부에 있다. 3부와 4부의 분석과 문장 역시 빛을 발하지만, 1부와 2부의 내용에 살을 붙이고 풍성하게 만드는 역할에 가깝다. 절대공동체란 무엇인가? 5월 18일의 시작 이후 19일과 20일을 거쳐, 마침내 21일 공수부대가 광주 시내에서 철수하기까지의 시간 속에서 탄생한 초월적인 경험. <녹색평론> 127호에 실린 레베카 솔닛의 <이 폐허를 응시하라> 서평에서, 장정일 선생은 솔닛의 '재난의 유토피아'가 최정운의 '절대공동체'와 거의 동의어라고 평가했다.


광주 시민들이 투쟁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 '인간임'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폭력의 메시지는 폭력을 당하는 인간과 이것을 보는 인간, 나아가서 그 시대 그 땅의 모든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었고, 광주 시민들은 이에 대한 분노로 이성을 잃고 사선을 넘었다. 92쪽

시민들이 추구했던 인간 존엄성의 회복은 개인의 용감한 투쟁에 대한 자기 확신 외에 동료 인간들의 인정 그리고 그들의 새로운 공동체, 절대공동체에서 객관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절대공동체의 핵심은 사랑, 즉 고결한 존재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었다. ... 생명이 공동체로 정의되자 그들은 국가권력을 요구했다. 무장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196~197쪽

그 가치는 조국일 수도 있고, 신일 수도 있다. 광주 시민들의 경우는 공동체와 동료 시민들의 생명과 존엄성이었다. 즉 인간의 존엄함은 자신보다, 자신의 생명보다 더욱 큰 가치를 설정하고 자신을 극복하며 목숨을 걸고 추구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197쪽

용기는 곧 인간의 자기보존의 본능을 극복하고 어떤 숭고한 가치에 스스로 목숨을 거는 데 있는 것이다. 이로써 인간은 죽음을 극복한, 시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신의 속성을 지닌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316쪽

시민들은 자신을 둘러싸는 공포의 벽을 뚫고 동료 시민들과 투쟁의 대열에 섬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자유를 얻어 완벽한 공동체로 융화되었다. 이 무한한 애정의 공동체는 바로 '민족'으로 느껴졌다. 49~50쪽

5.18 민중항쟁은 인간의 이성은 고독한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임을 의식하는 인간들이 이루어낸 것임을 보여준다. 이성은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공동체의 능력인 것이다. 201쪽


절대공동체 이후의 시간을 저자는 '해방 광주'라고 부른다. 즉 적 을 통해 아 가 탄생하고, 그 공동체 속에서 개인은 공동체의 삶과 죽음을 곧 나의 삶과 죽음으로 여겼고, 나의 존재를 뛰어넘어 더 큰 가치에 자신을 놓음으로써 존엄한 인간으로서의 절대적 평등의 환희를 경험한 다음, 적이 사라지고 난 뒤의 쓸쓸한 시간이 바로 해방 광주다. 총을 든 기층계급 중심의 시민군을 보며 중산층과 상층 계급은 혁명의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적에 대항하는 아, '우리'의 모습을 '애국시민', '민족', 태극기, 애국가 등 기존의 국가의 논리와 상징체계에서 표출했다. ... 이는 국군과 대항하여 싸우는 공동체가 자신의 정체를 국가의 논리와 상징체계로 나타냈다는 것을 뜻하며 한편으로 야만스런 공수부대가 '우리나라 군대'임을 부정하고 공동체 스스로가 정통성 있는 국가권력임을 요구했음을 뜻한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공동체는 독자적인 언어와 상징체계를 갖추지 못한 채 적을 규정하자 국가주의 담론 체계에 흡수되어버렸음을 뜻하는 것이다. 105쪽

기존 국가주의 담론의 그물망은 시민들이 적을 정의하자 아 에 또 하나의 적과 닮은 국가의 모습을 씌웠고, '우리'가 나라의 모습을 갖자 국가권력과 반공의 이념은 그들을 반역의 문턱으로 몰아세웠다. 해방광주는 혁명의 분위기에서 혁명의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혁명 담론을 거부했다. 111쪽

절대공동체가 국가로 변환되어 그의 무력을 갖추어 완성되었을 때 공동체는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 절대공동체가 국가로 진전되고 그 절정에서 총으로 무장하기 시작하자 이전에 공동체의 주인이라 느꼈던 계급은 두려움을 느끼고 주춤거리며 물러서고 있었다. 188~189쪽

절대공동체는 절대 단수였고 '각계각층의 대표'는 복수로 이루어진, 말하자면 계급으로 분화된 기존의 공동체의 재현을 뜻하고 있었다. 279쪽


(보다시피 담론은 현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절대공동체는 절대 단수였고, 수습위원회가 상징하는 '각계각층'은 복수로 이루어진, 절대공동체 이전의 삶, 이전의 질서, 이전의 가치를 뜻하는 것이었다. 수습위원 중에는 조비오 신부 같은 종교인들도 다수 있었고 이들은 마지막까지 시민군들에게 총을 내려놓으라고 설득했다. 그들의 마음을 의심할 수는 없다. 그들도 시민군들도 자신들의 결말이 무엇이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인들은 자신의 가치 체계에 충실하게도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목숨을 살리고자 했다. 하지만 조비오 신부 본인도 알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총을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간다면, 공수부대가 도청을 무혈으로 접수한다면, 모든 일이 끝나고 난 다음 자신들 앞에 굴욕과 분노, 모멸과 자기혐오로 가득한 슬픔의 역사가 펼쳐질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민중항쟁 당시에도 이후에도 광주 시민들을 비롯한 지식인들은 광주가 광주만의 것이 아니어야 함을 깨달았다. 그래야만 더 죽지 않을 수 있었고, 그래야만 상처를 달랠 수 있었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민주화론'이었다. 


투쟁의 논리에서 태어난 적으로부터 고장을 지켜야 한다는 향토방위의 숭고한 명분은 시민군을 만들어내고 이제 민주주의는 적으로부터 피로 지켜진 고장의 모습이었다. '고향을 우리 손으로 지킨다'와 민주주의는 두 개의 5.18 투쟁의 명분이었다. 그러나 후자는 논리적으로 전자에서 도출되었음에도 5.18 이전의 민주화를 위한 학생시위와의 일관성 그리고 당시 우리 사회의 지배적 정치 이념임을 고려하여 우선적으로 천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주 시민 측의 5.18 담론에는 '투쟁으로 얻는 민주주의'와 우리 사회의 보편적 정치 이념으로서의 민주주의가 혼재되어 있었다. 56쪽

해방광주 시민에게 민주주의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 공수부대의 만행은 독재에서 비롯된 것이며 ... 이 경우 민주주의는 하나의 제도적 수단이며 다시 폭력이라는 수단을 통해 이루어질 목적이 되며 따라서 현실적 수단과 궁극적 목표 사이의 이차적 가치이자 이차적 수단이 된다. ... 둘째, 민주화 요구는 해방광주 시민들로서는 의도치 않았던 혁명적 분위기에 처한 담론의 딜레마와 고독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95~96쪽

민주화 담론은 이들에게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한 길이었고 또한 운명을 예감하고 남긴 투사들의 유언이기도 했다. 106쪽


당시 광주 시민 개인은 분명 민주주의를 이해 총을 들고 나선 것은 아니었다. 전두화의 이름도 모르는 시민들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해방광주 이후의 궐기대회 현장에서 자신들이 겪은 이 일의 보편적 의미를 '민주화'의 맥락에 위치시키려고 했다. 위 인용문에서 말하듯 직관적으로 볼 때 자신들의 적이 바로 '독재 정권', '군부'였기 때문이다. 적이 먼저 규정됨으로써 '아', 우리도 규정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인가? 그저 '광주 사람'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는 명예회복도, 타 지역민들의 지지도, 역사적 정당성도 획득할 수 없었다. 그들은 광주 사람, 참된 조국의 국민인 동시에 '민주화에 앞장선 투사'들이 되기로 했다. 

광주의 다른 한 자식이 있다. 민중론에서 혁명론으로 이어지는 갈래. 실제로 시민군 중에는 사회 기층계급, 한마디로 '프롤레타리아' 혹은 '룸펜 프롤레타리아트'가 많았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켰던 이들 중 다수도 그랬다. 여기서 '계급'이라는 개념은 의미를 획득한다. 최정운 선생의 계급 개념은 맑시즘이 아니라 부르디외의 개념에 기반한다. "사회 계급의 존재는 일차적으로 사회에서 분배되는 인간 존엄성의 차이에 있는 것이며 경제적 재화와 생산수단은 그 일부인 것이다."(101쪽) 즉 '민중'은 주체가 아니라 현상이었다는 지적. 


약속대로 5.18은 부활했다. ... 부활한 모습은 전과 같지 않았고 그의 새 이름은 '민중'이었다. ... 그들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었지만 '말이 필요 없는' 절대적 사랑의 공동체였고 여기서 광주 시민들은 민족을 살갗으로 느꼈다. 민중의 다음 모습은 사회의 맨 아래의 천덕꾸러기, 도시 빈민, 룸펜으로 당시 공수부대와 맞서 격렬하게 싸웠던 그리고 마지막까지 항거하다 죽은 그 사람들이었다. 78쪽

민중은 5.18 안에서 발견되어 다시 5.18 자체를 규정한 셈이다. 74쪽

5.18의 민중이 계급으로서, 여러 계급의 집합으로서 참여했다면 그것은 계급의 이해라기보다 계급의 에토스 또는 아비투스에 의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99쪽

사회주의 혁명론은 5.18 담론의 딜레마를 인식하고 다른 현실로 도피한 의식적으로 선택된 지성적 정신분열의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107쪽


이어서 후대의 사회과학 담론을 비판하는 아래의 대목들은 신랄하면서도 마음 아프다. 


당시 사회과학자들은 5.18 해석은 구조주의적 설명에서 출발하여야 한다는 점에 합의했다. ... 5.18이 왜 필연적으로 일어나야만 했고, 방지할 수 없었던 구조적 원인에 의한 사건이었다는 논거는 5.18이라는 특정한 사건의 경험적 연구에서 도출된 결과라기보다는 사회과학의 언어구조, 특히 맑시스트 정치경제학 언어구조에 근거하고 있다. ...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담론은 5.18을 특정한 사건으로 보지 않고 여러 사건 중의 하나 또는 '구조적 조건'의 발현으로 보아 사건으로서의 5.18을 매몰시켰다는 사실이다. ... 5.18의 투쟁주의가 배태한 우리의 사회과학은 자신의 출생의 역사를 다시 쓰며 자신의 모태를 매장해버렸다. 76~77쪽

'진실'을 '진리'로, 공동체를 위한 투쟁의 의무와 보람을 인류의 영원한 참모습으로 착각하고 일상생활의 세계로 돌아올 것을 고집스레 거부했던 슈미트는 이상적 파시즘으로 빠졌고 그 위험은 5.18의 후예들에게 상존하는 것이다. 325~326쪽

1980년대 말에 부상했던 '우리의 사회과학'은 ... 지성을 투쟁의 도구로만 여기고 자체의 묘미와 독자적인 의미를 인정치 않는 반지성주의의 산물이었다. 342쪽


마스터피쓰. 전범. 대가의 책.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한국 사회과학 연구의 전범이라고 나는 본다, 이 책. 한국의 사회과학자로서 이만한 책 한 권 쓰고 죽는다면 그는 학자로서 최대한의 성취를 이뤄냈다고 나는 본다. 그리고 그런 책을 만들 수 있다면 나 역시 편집자로서 더한 영광이 없겠다.  




오월의 사회과학

저자
최정운 지음
출판사
오월의봄 | 2012-05-10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새로운 사회과학 글쓰기로 해방광주를 생생하게 복원하다!사회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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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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