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잖아... 나, 낙태했어

한국여성민우회 지음 | 다른 | 2013년 


모두 25명의 여성이 낙태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았다. 기혼자, 미혼자, 10대부터 50대까지, 세대와 계층과 직업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구어를 그대로 담은 이 인터뷰집에서 거창한 이론은 찾아볼 수 없다. 낙태 당시 여성들의 경험에는 크고 작은 차이가 있었지만, 모든 여성들이 공통적으로 겪은 상처, 부당한 대우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마침 지난 주말 한겨레 토요판에서 장정일 씨의 서평을 읽었다. "태법에 관한 역사는 임신한 여성의 몸이 남성 또는 가부장 사회와 국가의 지배나 관리를 받아야 한다는 불합리한 면모를 보여준다. 이혼 소송에 불리해진 남자가 동거녀의 임신중절을 고소할 수 있었던 데에는 남자가 임신한 여성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한편, 자신의 공모는 공범으로 문책받지 않는 법의 맹점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몇몇 예외 말고는 낙태가 불법인 우리나라에서 여성의 낙태 결정에 함께 가담했던 남자는 처벌받지 않는다."(한겨레, "남자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 2013년 3월 29일.


그러니까 저는 저출산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가 가족주의를 흔드는 거에 대한 공포가 있는 것 같아요. 위험한 인간들이 생기는 거에 대한 두려움? ... 그 사람들을, 관계를 인정을 하는지에 대한 부분을 얘기부터 해야 하는 거죠. 낙태도 결국은 가족주의 자체, 결혼 제도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 과연 누가 타인의 성관계에 돌을 던질 수가 있겠어요? 사람 마음이 가는데. 120쪽

그때 우리가 웃으면서 어떤 농담을 하자라던지, 서로 애칭을 부른다던지, 집에 돌아와서 같이 누워서 음악을 듣는다던지, 어떤 식의 위로를 해 줄 수 있을 만한 작은 장치를 만들었으면 각자의 다른 몫으로 경험을 공유했을 것이고, 그걸 보다 지혜롭게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후회가 많이 남아요. 우리가 너무 무기력하게 서로를 방치하고 자신을 방치했다는 죄책감이 그 대화 자체를 주제로 오랫동안 얘기하지 못하게 하는 주된 원인 중의 하나인 것 같아요. ... 저도 그 얘기를 하고 싶었고 그때 신랑하고 미리 그런 거 자그마한 위안거리를... 그 침묵만큼 서로를 괴롭히는 게 없더라고요. 참 힘들었어요. 우리 둘 다 의도하지 않았던 상황에 사랑하는 사람을 빠트렸다는 것이 참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낙태를 하게 되더라도 서로 위안해줄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 줄 수 있다는 게 꼭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너무 하고 싶어요. 147~148쪽


놀랍게도 한국에서 낙태는 불법이다. 그래서 낙태 당시 구두로 합의했던 어떤 남성은 낙태 수술 이후 여성을 낙태죄로 형사 고소하기도 했다. 구두 합의 사실을 증명하기 힘든 여성은 고스란히 범죄자가 될 판이다. 지난 2012년 헌법재판소는 낙태죄를 합헌으로 판결했다. 이 썩을 영감탱이들이 낙태죄 폐지는 생명 경시 사상을 불러올 수 있다고 판결했다. 책의 부록으로 한국의 법 조항과 낙태 관련 통계를 실어놓았고(일단은 추정치이긴 하지만), 해외 각국의 낙태 관련 상황을 밝혀놓았다. 독일, 그리스, 핀란드, 프랑스 등의 유럽의 국가는 임신 3개월 이내의 임신중절 수술은 전적으로 당사자의 요청에 따라 가능하다. 어제 다 읽었던 <신 없는 사회>에 따르면 덴마크였나 스웨덴이었나, 여성의 임신중절 요청을 의사가 거절할 경우 그를 처벌하는 법이 있다고까지 했다. 


말의 무력함에 대해서 생각했다. 혹은 몸의 힘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 책을 읽은 한 남성은, 그 여성들이 겪은 부당한 처우와 그들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제도와 잔인한 장면들에 마음 아파하면서도, 그저 한 권의 책과 한 권의 말로만 대하며 언제든 손쉽게 잊을 수 있다. 여성이 이 책을 읽으며 느낄 것들, 그들의 마음에 생길 것들을 그는 가늠조차, 짐작조차 하기 힘들다. 다만 낙태죄가 전적으로 부당하고 부정의한 법이라고 생각하는 그는 낙태죄의 폐지를 위해 가능한 노력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또한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낙태를 불법으로 처벌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나이 되어 이제야 알았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부끄러워한다. 


정말 부끄러웠다. 



있잖아 나 낙태했어

저자
한국여성민우회 지음
출판사
다른 | 2013-02-20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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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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