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립자
미셸 우엘벡 지음 |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원작 1998년)
한 사람의 여자와 한 사람의 남자가 내게 이 책을 추천했다. 그들의 예상 혹은 짐작대로 아주 감명 깊었다. 내가 아는 여러 친구들의 얼굴을 가만 떠올려보면, 대부분은 이 책의 이야기에 아주 크게 공감하지 않을 것이고, 이 책의 인물들이 겪는 문제에 시달리며 살지도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지금은 부인하지는 않는 편이다.(당신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질투 어린 축복을.)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 책의 인물들이 느끼고 겪는 고통과 그들의 고통의 근원에 아주 많이 공감하는 인간이었다. 동시대 내 또래의 한국인이라면 이 책에서 각자 공감하는 부분이 어쨌든 있긴 할 것인데, 그러니까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다 그랬다는 말이다.
(BGM - 오지은과 늑대들, <없었으면 좋았을걸>)
공간은 살과 살을 갈라놓는다. 말은 통통 튀면서 살과 살 사이의 공간을 가로지른다. 타인의 이해도 얻지 못하고 반향도 일으키지 못한 그의 말들은 허공에 고인 채 썩는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건 누가 보기에도 명백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말도 살과 살을 갈라놓을 수 있는 셈이다. 123쪽
그것은 일체의 성적인 욕구에 앞서는 단순한 접촉의 욕구였다. 그저 상냥한 사람의 몸을 만지고 싶은 욕구, 상냥한 사람의 품에 안기고 싶은 욕구였다. 다정함은 성적인 매력에 앞선다. 그래서 철저히 절망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이다. 59쪽
인간은 때로 야만의 숲 한복판에 사랑이 햇살처럼 빛나는 작고 따뜻한 자리를 만들어 낼 줄 알았다. 서로 주체가 되고 서로 아껴 주는 작은 공간을. 96쪽
"내가 보기에 남자들은 대부분 삽입 성교보다 펠라티오를 더 좋아해. 삽입 성교는 남자들을 난처하게 만들 때가 많지. 발기 상태를 유지하기가 어렵거든. 하지만 시들시들하던 성기도 입 안에 넣어 주면 다시 팔팔해져. 페미니즘이 펠라티오를 좋아하는 남자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을 거라는 느낌이 들어. 남자들이 고백하는 것 이상으로 말이야."
"그런 관점에서 보면 페미니즘보다 더 나쁜 것은 없지..."
(...)
"이곳에 오는 나이든 여자들은 쇠약해지고 추해진 몸을 팔고 있는 거나 진배없어. 그녀들 스스로도 그것을 알고 있어. 그래서 또 고통을 겪지. 그런데도 그 짓을 계속해. 사랑받는 것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지. 그녀들은 죽을 때까지 그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해. 여자는 어떤 나이가 되면, 남자의 성기에 자기 몸을 비빌 수는 있어도 남자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는 없어. 남자들은 원래 그런 족속이거든."
"크리스티안, 그렇게 과장할 건 없어. 남자라고 다 그런 건 아니잖아. 예컨대, 지금 난 당신을 즐겁게 해주고 싶어."
"그래, 당신 말을 믿어. 당신은 친절한 남자 같애. 이기적이면서도 친절한 남자야." 153~154쪽
"나는 인생을 사랑했어. 감수성이 풍부하고 천성이 다정다감한 사람이었지. 나는 섹스하는 것을 언제나 무척 좋아했어. 그랬는데 뭔가 나쁜 일이 벌어졌어.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내 인생에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해." 162쪽
"그때까지 이미 수십 명의 남자와 자보았지만, 그중에 기억할 만한 남자는 한 사람도 없었어. (...) 나는 그런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어. 그런 판에서 벗어나고 싶었지. 이제 나는 새로운 삶을 살고 있어. 쾌락에서 놓여난 평온한 삶이야. 퇴근해서 돌아오면 책을 읽고 허브 차나 따뜻한 음료를 마셔. 주말에는 크레시에 가서 조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 하지만 때로 남자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건 사실이야. 밤에는 무섭고 잠을 잘 이루지 못해. 신경 안정제가 있고 수면제가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 인생이 아주 빠르게 지나갔으면 좋겠어." (...) 여자들은 대부분 달뜬 채 청소년기를 보낸다. 그 시절에는 남자들과 섹스에 관심이 많다. 그러다가 점차 섹스에 싫증을 낸다. 허벅지를 벌리고 싶은 마음도 엉덩이를 내밀기 위해 등을 구부리고 싶은 마음도 시들해진다. 그녀들은 애정 어린 관계를 원하지만 찾아내지 못하고, 열정을 원하지만 예전처럼 진정으로 느끼지 못한다. 그러면 그녀들에게는 괴로운 세월이 시작된다. 252쪽
"유머는 사람을 구하지 못합니다. 따지고 보면 거의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죠. 유머를 가지고 인생사를 대하는 게 몇 년 동안은 가능할 겁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죽음이 임박하는 순간까지 유머를 잃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결국 인생은 사람의 마음을 부숴 버립니다. 평생에 걸쳐 용기나 침착함이나 유머 같은 특성을 키워 왔다고 해도 마지막 순간이 되면 마음이 허물어지고 말죠. 그러면 사람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십니다. 결국 남는 것은 고독과 추위와 침묵뿐입니다. 종당엔 그저 죽음이 있을 뿐이죠." 313쪽
남자는 <유럽문화사>(도널드 서순 지음, 뿌리와이파리, 2012년)를 읽고 있었다. 저녁에 여자와 약속이 있었다. 여자와 남자는 각각 한 번씩 제 나름의 추파를 던진 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집에 남자를 불러들이려 했었지만 남자는 거절했었다. 당시에 남자는 자기가 그녀를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자에게서 우회적인 거절을 들었던 날, 지하철 역으로 향하며 여자의 집에 가고 싶다고 했다. 남자는 자기가 여자와 자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집에서 각자의 일을 하다 드라마를 한 편 보고, 두 개의 방에서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여자가 내려준 커피를 마시고, 여자의 집을 나서 어제의 옷차림 그대로 출근했다.
남자는 여자의 이야기를 버거워했지만, 그녀가 이뻐보여서 이야기를 온전히 짊어지기로 했었다. 하지만 남자는 결국 여자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여자의 앞에 있는 자기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와 섹스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내내 했지만, 자기의 기억들 때문에 여자의 추파를 먼저 거절하지 않았는가. 남자는 여자와 자신이 무엇이 되었으면 하는지를 알 수 없었다.
보름이 지나 남자는 여자를 만났다. 남자는 그 사이 스스로가 지쳤다고 결론내렸다. 여자는 먼저 연락하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남자가 먼저 연락을 했다. 그렇게만 둘은 만났다. 남자는 여자가 자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여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남자는 데자와를 주머니에 넣었다. 지하철에서 데자와를 홀짝 마시며 생각했다. 집에 가면 <유럽문화사>를 읽어야지. 소설은 읽지 말아야지. 그리고 한 편의 픽션을 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