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문화사 1 - 서막 1800~1830 

THE CULTURE OF THE EUROPEANS

도널드 서순 지음 | 오숙은, 이은진, 정영목, 한경희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2년


* 독서모임에서 읽고 있는 책. 이제 3권 절반, 35장까지 읽었다. 독서모임이 아니었다면 이 책을 다 읽을 일은 평생 가도 없었을 거다. 사실 이 책을 읽는 데 지금 이 독서모임은 최상의, 최적의 장이다. "넷이서 옮기고, 넷이서 편집하고 일 년 반에 걸친 편집기간을 가졌다"는, 권당 500쪽이 넘는 5권의 책을 책임 편집한 편집자, 책의 일부분을 감수하기도 한 번역가와 함께 읽기 때문이다. 


미술을 제외한 1800년 이후의 모든 문화 분야를 다룬다. 2012년 제53회 한국출판문화상 번역 부문을 수상했다. 문화산업에 종사하는 혹은 종사하기로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재밌게 읽을 것이다. 우리가 역사에서 길어올릴 수 있는 통찰, 흥미진진한 세부적인 사실들로 가득하다. 레퍼런스로 삼는 데 최적의 책이면서도 노련한 역사학자의 서술은 마치 소설을 읽는 것처럼 흡입력 있다. 책의 내용을 살피려면 출판사 뿌리와이파리 블로그에 올라온 저자 도널드 서순 인터뷰를 읽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책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인 단어는 바로 에스테로필로esterofilo였다.(이탈리아어다. 19세기 이탈리아 문화산업을 두고 바로 이 단어를 사용한다. 같은 뜻의 영어 단어로는 xenophile.) 외국것이라면 다 좋아하는 사람. 우리들, 문화생산물의 충직한 소비자라 자부하는 우리들은 대부분 양학을 공부하고 서구에서 생산된 문화생산물의 풍요로운 바다에서 헤엄치는 사람들 아닌가? 


* 고급문화와 저급문화를 정의하는 일은 난감하다. 특히 스스로를 고급문화 소비자라고 생각한다면 더욱. 이럴 때 역사를 추적해야 한다. 저자 도널드 서순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고급과 저급의 구별은 자주 하겠지만, 이것을 대체로 청중과 시장의 문제로 볼 것이다."(26쪽) 그의 논지는 3권까지도 일관된다. 오히려 그럴 수밖에 없다. 장르소설 같은 새로운 형식의 문화생산물이 등장할 때마다 그의 논지는 거듭 증명된다.


* 이 책은 문화의 '산업적 측면'을 다룬다. "문화생산물이 유통되는 방식은 그 내용을 규정한다. 그 생산물이 목표로 삼는 공중도 같은 역할을 한다."(18쪽) "문화시장, 그리고 그 시장을 지탱하는 분업이 이 책의 주제다."(27쪽) "여기서 서술되는 문화 이야기는 시장을 위한 생산의 이야기다."(27~28쪽) 오늘날 많은 사회에서 문화생산물은 시장을 통해 생산자에서 소비자로 전달된다. 시장을 통해 생산되고 시장을 통해 소비되는 자본주의적 소통 방식을 비난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문화가 거래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그런 세상도 나쁘지 않겠지만, 시장이 펼쳐놓은 이 풍요로운 문화의 세계가 나를 키웠고, 내 삶을 풍요롭게 했고, 그래서 이 톱니바퀴의 한 부문에 속하도록 만들었다. 가치판단은 삼가는 게 좋겠다. "레비 스트로스는 자서전 <슬픈 열대>에서 "인간사회는 개인과 마찬가지로-그들의 놀이와 꿈, 환영 속에서-절대적인 창조를 하는 것이 결코 아니고, 관념들의 저장고에서 특정한 조합을 선택한다"고 강조한다."(198쪽)


* 그래서 이 책은 한편으로 자본주의의 역사이고, 유럽 근대사다. 19세기 자본주의사, 유럽사를 읽은 적이 있다면 이 책은 동시대의 다른 한 측면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책의 전체 분량에 필적하는 장기 19세기 홉스봄 3부작을 먼저 읽는다면, 더 풍성한 이해가 가능할 것이며, 아귀가 탁탁 맞물리는 느낌에 희열을 느낄지도 모른다. 


* 19세기에 비로소 탄생해 가장 광범위하고 다이나믹하게 변화한 문화 산업이 바로 출판이었다. 다섯 권 전체의 절반 정도 되는 분량이 출판과 언론에서 일어난 일을 다룬다. 언론과 매체의 역사는 책 못지않게 중요하다. 신문, 잡지라는 것도 활자 생산물을 대중에게 판매하기 위해 탄생한 발명품이기 때문이다. "인쇄술, 신문, 책은 19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누구든 집으로 가져갈 수 있고 글만 읽을 줄 알면 특별한 기술이나 장비 없이도 소비할 수 있는 유일한 문화상품이 되었다."(121쪽) 책의 위기를 말하는 것은 19세기, 20세기 유럽과 21세기 한국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이다. 천재적인 통찰과 직관을 가지지 못한 우리가 현재의 위기와 닥칠 위기를 이해하고 짐작하려 할 때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역사이다. 당시의 위기의 성격을 이해한 다음 어떤 인물들이 위기에 어떻게 대처했고, 그들이 성공하거나 실패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최선이다. 우리는 현재의 위기를 이해하고 대처하는 데 옛 업계 선배들의 방법을 참고할 수 있다. 


"문맹은 당연히 책을 못 읽지만, 그렇다고 책 읽는 데에 글 읽는 능력만 있으면 되는 건 아니다. 책을 사거나 빌리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일에서 벗어난 시간이 있어야 한다. 책을 읽게 하는 사회적 유인이 있어야 한다. 책을 이해하려면 교육을 받아야 한다."(62쪽) 

"1750년과 1850년 사이, 유럽 전역과 북아메리카에서는 점점 더 내용이 세속화되는 텍스트들을 혼자 묵독으로 읽는 것이 지배적인 독서방법으로 자리잡았다."(112~113쪽)

"프랑스 '도서대여점'의 황금기는 1815~1848년이었다. 그 무렵의 도서대여점의 팽창은 수많은 출판업자와 인쇄업자를 파산으로 몰아넣은 1826년의 금융위기에서 촉발된 것이었다. 팔리지 않은 재고도서들이 도서대여점을 차리는 데에 쓰였다."(156~157쪽) 

"서점에서 책을 훑어보며 고르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사람들은 주로 입소문과 서적상의 권유, 그리고 오늘날보다 훨씬 더, 문학지에 정기적으로 실리는 서평에 의존했다."(383쪽) 

"영어에서는 소설도 아니고 시도 아니고 드라마도 아니면 논픽션이다. 프랑스어에는 영어의 논픽션에 정확히 대응하는 말이 없다. ... '곧 소설이 아닌 작품들'이다. 프랑스 서점에서 '논픽션' 구역은 '일반적인 책들'이라고 쓴다. 이탈리아어도 마찬가지로 장황하게 '소설 아닌 작품들'이라고 말한다. 독일어에서 논픽션 책은 '사실적인 책'이다. 으레 그렇듯, 문제는 언어가 아니라 세계다."(349쪽)


정말 깨알같이 흥미로운 내용들이다. 


* 7장 제목이 바로 '소설'이다. "소설과 자본주의 사회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다. 그러나 그 연관성이 꼭 이데올로기적인 건 아니다. 연관성은 그보다는 소설의 대량생산이 산업화에서 핵심적인 부분이라는 데에 있다."(251쪽) '대량생산'이 '산업화'의 핵심이다. 소설에 관한 이야기는 이 장에서만 다루어지지 않는다. 각각의 장이 소설에 대한 서술을 점층적으로, 조각을 맞추듯 완성시켜 나간다. '왜 사람들이(일부 계급이) 18세기 초 소설에 열광하기 시작했는가?'에 대한 답은 이전의 장들을 모두 종합함으로써 가능하다. 7장의 테제, 사실 각 장의 테제들이 모두 단순하고 명쾌하다. 


"우리가 알기로, 하나의 장르는 그것에 대한 패러디가 만들어질 때 확립된다. 패러디는 그것이 조롱하는 대상이 널리 인정받은 뒤에 등장하기 때문이다."(242쪽) 

"사실 소설의 발전은 단순히 소설가, 곧 이야기를 가진 이들하고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일군의 경제, 사회적 관계의 등장과도 관련이 있다. 그런 관계 안에서, 들려줄 이야기가 있는 이들은 이야기의 인쇄를 맡기고 이야기로 먹고살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소설가들의 존재는 소설시장이 있기에 가능하고, 작가, 인쇄업자, 서적상, 출판사가 있기에 가능하며, 무엇보다도 독자들이 있기에 가능하다."(244쪽)


* 흥미로운 이야기 중 하나가 바로 '내부자/외부자'라는 주제이다. 문화생산물의 역사에서 혁신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걸까? 이탈리아인과 스페인인은 19세기와 20세기까지도 출판에서 대체로 뒤쳐져 있던 반면, 러시아인들은 어떻게 해서 오늘날까지도 고전이 된 문학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역사소설의 창시자이자, 저자가 한 장 전체를 할애한 영국 소설가 월터 스콧에서 이 주제가 처음으로 언급된다. "스콧은 내부자/외부자라는 고전적 사례의 한 변종이었다."(291쪽) "영국과 프랑스가 패권을 쥔 것은 재능이 골고루 배분되지 않아 다른 나라보다 두 나라가 기적처럼 소설가의 비율이 높아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더 발달하고 더 짜임새 있게 조직된 두 나라 시장이 수요를 만들어내고 더 많은 작가를 끌어들인 덕분이었다." 326쪽


* 1권은 일단 여기까지. 조만간 2권도 정리해야 한다. 2권은 이렇게 오래 걸리지 않겠지... 


"하지만 이 모든 것 뒤에는 인정받지 못한 채 홀로 고통을 겪는 이들의 우주가 있다. 마치 난자에는 결코 이르지 못할 운명이지만 창조 과정에는 없어서는 안 될 수많은 정자들이 있듯이."(28쪽)

"그렇게 하찮아 보이는 것-전쟁과 평화, 병마와 싸우는 일, 먹거리와 집을 확보하는 일 같은 묵직한 일들과 비교할 때 하찮다는 것이다-을 추구하는 데에 그렇게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이야말로 문명의 특징이다."(37쪽)




유럽 문화사. 1: 서막 1800 - 1830

저자
도널드 서순 지음
출판사
뿌리와이파리 | 2012-07-25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200년 동안 유럽인들이 소비해온 문화형식을 폭넓게 조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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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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