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 국가 Der Staat Hitlers(1969년)

마르틴 브로샤트 Martin Broszat 지음 | 김학이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옮긴이의 판단으로는, 1969년에 처음 간행된 이 책은 1945년 이후 ‘독일’에서 생산된 가장 위대한 나치즘 연구서이다. 지은이는 주요한 나치 개개인의 의도를 중심으로 나치즘을 설명하는 “의도주의” 연구와 사뭇 다르게, 나치즘의 작동 방식에 주목하는 “기능주의” 연구를 이 책으로 개시했다. 그래서 이 책을 모르면 나치즘의 ‘연구사’를 모른다. 이 책 이후 발표된 거의 모든 주요 나치즘 연구가 지은이의 주장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이 책과 씨름해왔기 때문이다. (옮긴이 해설, 497쪽, 강조는 인용자.)


그리고 이 책에 실린 김학이 선생의 '옮긴이 해설'은 한국인이 나치즘을 공부해보려고 마음먹을 때 최고의 안내문이다. 당장 서두에서부터 국내에도 꽤 알려진 로버트 팩스턴의 <파시즘>을 비판한다. "실상 이름값에 턱없이 모자란다." 옮긴이의 말이 아니라 '해설'인 이유가 있다. 책의 핵심 내용을 꼼꼼히 충실하게 요약하고 정리할 뿐만 아니라 국내에 나치즘과 관련한 어떤 책이 번역되어 있고 그 책들을 어느 순서로 읽으면 되는지까지 안내한다. 해당 분야를 현지에서 충실히 연구한 학자가 쓴 이만한 해설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다중지배히틀러의 카리스마적 지배 나치 이데올로기의 삼각관계가 나치 체제를 홀로코스트로 이끌었다는 것이야말로 브로샤트가 이 책에서 제시한 나치즘 설명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브로샤트가 발견한 것은 권력 행사의 즉흥성과 무체계성이었으며, ... 그러한 무정부적인 체제와 나치 운동의 비상한 역동성이 인과적으로 결합되어 있었으며, 그 결합을 보장한 것이 카리스마적 지도자로서의 히틀러의 존재였다. ... 브로샤트는 그 실마리를 나치 세계관에서 찾는다. 세계관 운동으로서 나치즘의 핵심은 '원민중적' 민족주의로, 원민중은 역사에 앞서 존재하되 미래에 완성될 것으로서, ... 그것은 본질적으로 종말론이고, 유토피아적인 기대이며, 정치 은유다. ... 따라서 각자는 그 속에 구체적인 현실적 열망과 원한을 투사하고 또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치 이데올로기의 내용들은 상황에 따라 상호 교환될 수 있고, 또 "행동Aktion"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 나치가 행동 우위의 선동 및 투쟁 정당으로 일관한 것은 이로써 쉽게 설명된다."


"나치즘은 조직의 매 단계에 자리한 우두머리와 추종자 간의 개인적인 붕당적 결합과 그 우두머리들 사이의 개인적인 유대에 의해 짜인 운동이었던 것이다. ... 조직의 혼란은 정책의 혼란을 야기한다. 나치 조직은 따라서 실행 가능한 정책의 개발과 실천에 지극히 부적합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조직원들이 상황에 따라 독자적인 이니셔티브를 발휘하여 위기에 빠진 사회적 파편들을 끌어들이고 동원하는 데는 대단히 탁월하였다. ... 브로샤트가 보기에 히틀러는 대중의 원망이 표출되는 통로인 동시에, 나치 세계관이 오로지 그를 통해서만 비로소 정치적 현실로 되는, 이데올로기와 현실 사이의 유일한 번역자였다."(이상 옮긴이 해설에서 인용, 강조는 인용자.)


* 대가의 필력을 맛볼 수 있는 역사서. 깔끔한 서술과 충실한 사료, 명확한 테제 등 대가의 필력의 보편적 요소라 부를 만한 것을 이런 책들을 읽어나가면서 조금씩 확인하게 된다. 히틀러에 관한 다음의 대목은 마치 소설의 한 구절 같다. "그런 종류의 연설을 하는 사람은 섬세한 정신적인 구별 능력이 있거나 자신 안으로 침잠하는 성숙한 개인이 아니다. 그런 연설이 필요로 하는 사람은 (여타의 파쇼적 혹은 비합리적인 대중운동이나 각성운동 지도자들이 그렇듯) 자기 시대의 위기의식과 공황 심리에 의해 스스로가 관통당한 사람, 그리하여 시대의 위기의식을 본능적으로 식별하는 사람, 그 위기의식을 부채질하는 선동가의 역할에서 그동안 뼈아프게 부재했던 자기 존재의 고유한 사명감과 실촌적 충만감을 발견해내는 사람이다."(48쪽, 강조는 인용자.) "정치적으로 성숙한 사람에게는 공허하게만 느껴지던 그 언어들은 다른 수백만 명을 만족시켰고 또한 환호케 했다."(111쪽) 


* 대가의 탁월한 필력, 최적의 역자에 더해 편집 요소 역시 훌륭하다. 편집 요소 중에서 무척 마음에 들었던 것은 저자의 주석을 후주로 돌리지 않은 것이었다. 저자의 주석이 아주 많은 것은 아니지만, 대개 저자의 주석을 후주로 두고 역주를 각주로 처리하는 것이 요즘의 관행이다. (근데 출처 주를 찾아볼 수 없다. 원서가 원래 그랬던 걸까? 독일 책은 출처를 주로 밝히지 않는 게 관행인가? 편집 과정에서 출처 주를 삭제했을까?) 이 책에서는 저자와 역자의 주석을 본문에서 구분 없이 하나의 약물 *로 표기한 다음, 각주의 첫머리에서 역주는 (옮긴이)라고 표시하여 구분했다. 길에서 나온 치폴라의 <중세 유럽의 상인들> 역시 역주와 저자 주를 모두 각주에 실었는데, 본문에서 위치를 표시할 때 번호에다 별도의 글씨체를 적용해서 구분했다. 아래 각주 구역에서 두 종류의 주가 번갈아 등장하는 부분은 어지러워 보였다. 


* 책을 읽기 전에 먼저 얼마 전 완간된 <히틀러의 성공 시대>(김태권 지음, 한겨레출판)를 먼저 읽어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저자 본인이 밝히듯 "나는 이 책에서 의식적으로 나치즘과 제3제국의 '내부' 역사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 정세나 나치즘과 관련이 있는 당시의 주요 인물들을 일일이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김태권 선생의 만화는 한겨레 토요판 연재 당시 몇 번 살펴보았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만화를 먼저 보았더라면 적잖이 도움이 되었을 것 같고, 아마 집필 과정에서 이 책을 적잖게 참고하셨을 것 같다.


* 책을 읽으며 여러 대목이 흥미롭고 인상적이었다. 그중 하나는 숱한 나치당 관료들의 이름과, 당내 체계를 합리화하려고 노력했던 그들의 의지와 열정, 에너지였다. 공식적인 관료 체계가 사실상 기능을 하지 못했음에도 당 실무자들의 정력적인 업무 수행 덕택에 일관된 체계도 규범도 없는 집단이 이처럼 거대한 당-국가가 될 수 있었고 마침내 전쟁도 수행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히틀러국가의 "작동"에서 중요한 것은, 전통적인 보수적 관리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프리크가 대표하던 권위적 국가질서라는 나치 국가의 판본이 분권적인 나치 권력자들의 독자적인 의지와 특수 조직들의 예외적 지배를 막을 수는 없었지만, 그 예외상태 곁에서 행정국가의 질서를 유지함으로써, 특수 권력에 의해 초래된 법적 진공 상태가 나치 체제를 파탄으로 몰아갈 정도는 되지 않도록 했다는 점이다."(193쪽) 또 이런 대목은 주워 들은 풍문으로만 그친 나 같은 얼치기에게 매우 도움이 되는 사실이다. "노동자들과 사무직 근로자들에게 근본적이고 결정적이었던 제3제국의 체험은 오히려 몇 년간의 경제위기 이후 일자리의 안전성을 확보했다는 사실이었다. 어떤 수단을 사용하였든,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이었든, 히틀러는 1935년에 이미 실업을 거의 없앴고 그렇게 수백만 명의 존재를 위협하던 문제점을 극복했다."(231쪽)


* 한국에서는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같은 말로 나치즘을 간단히 설명해버리고는 한다. 아렌트를 읽는 것 자체는 탓할 일이 전혀 아니지만, 거기에만 그치려는 것도 아쉬운 일이다. 역사를 함께 읽으면 좋겠다. 




히틀러 국가

저자
마르틴 브로샤트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2011-05-30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나치즘에 대한 전체주의적 해석을 뒤흔들다독일 나치즘 연구의 걸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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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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