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

La Lenteur (1995년)

밀란 쿤데라 지음 |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1995년


쿤데라가 유명하긴 한가 보다. 1995년 프랑스에서 초판이 발행되자마자 국내에 번역되었다. 내가 읽은 판본은 1995년 한국어판 초판이고, 지금은 쿤데라 전집 중 하나로 새로 꾸며 나와 있다. 앞날개의 저자 사진이 좀 부담스럽다. 


그는 그런 일을 끔찍하게 여긴다. 자신의 생각들을 널리 펴는 자는 사실 타인에게 자신의 진실성을 납득시키고, 그들에게 영향을 주고, 그리하여 세상을 바꾸기를 갈망하는 자들의 부류에 속하게 될 소지가 있다. 세상을 바꾼다는 것! 퐁트벵으로서는, 이는 흉물스럽기 짝이 없는 생각이다! 29쪽


얇고 작은 책이다. 민음사에서 전집이 나오고 있어 다른 작품들과 비교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까지 쿤데라의 소설 세 편, 산문집 한 편을 읽었다. <농담>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꽤 긴 장편 소설이다. 비교적 많은 등장 인물, 가볍지 않은 역사적 무대를 배경으로 삼았다는 점이 닮았다. <정체성>과 이 작품은 매우 짧은 분량에 등장 인물의 수도 많지 않고, 전반적으로 일종의 소극 같은 느낌이면서도 서늘하게 찌르는 구석이 있다는 점이 닮았다. 산문집은 <커튼>인데 네이버 지식인의서재 에서 이적 씨가 추천한 걸 보고 골라 읽었던 기억이 있다. 


기법 혹은 형식의 측면에서 일종의 메타 소설적인 구석이 있다. 쿤데라 본인을 닮은 소설가가 이야기의 서술자로 등장하면서, 서술자가 쓰는 소설의 등장 인물들이 서술자의 현실에 개입해 들어오려는 기미가 간간이 눈에 띈다. 이런 형식적인 특징은 소설의 메시지 중 하나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이 작품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언제나 타인의 시선을 신경쓴다는 것, 과거와 달리 의식적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떼어낼 수 없는 혹처럼 자신을 지켜보는 타인의 시선을 머릿속 어딘가에 장착해두고 살아간다는 것을 조소하듯 그린다.(<농담>의 장면이 생각난다. 모두가 손을 든 강의실 장면.)


책을 빌려준 친구는 쿤데라가 정말 글을 잘 쓰는 소설가라고 그랬는데, <농담>을 읽었을 때라면 그 말에 십분 공감할 수 있었을 텐데, 이 소설은 잘 모르겠다. 친구가 읽은 만큼 읽지 못했다는 생각도 들고,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내 취향에 아주 들어맞지는 않는 소설이라는 생각도 들고, 아마도 작가가 독자들이 어딘가에 한 시간쯤 앉아서 낄낄 웃으며 가볍게 읽으라고 쓴 소설 같다는 생각도 든다. 




느림

저자
밀란 쿤데라 지음
출판사
민음사 | 1995-04-01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속도의 문명에 거는 경쾌한 제동. 느림보 산책가의 유쾌한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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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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