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비행 - 생계독서가 금정연 매문기

금정연 지음 | 마티 | 2012년


흔히 우리가 서평으로 생각하는 것, 한 책이 다른 여러 책들의 지도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짚어주고 그것의 사회적 맥락을 언급하는 식의 글과 많이 다르다.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금정연스럽다'는 말밖에 달리 적절한 말을 찾을 수 없었다(그 '스러움'이 때로는 고르지 않다는 생각도 들지만). 


바로 위의 문단을 나는 2013년 2013년 10월 11일 오전 8시 37분에 썼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쓴다. 오늘 참 오랜만에 무언가를 써 보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겼고 책장에 꽂지 못한 채 식탁이며 거실에 쌓여 있는 '읽은 책'들을 얼른 해치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바로 이 글을 마무리하려는 중이다. 


서평집을 읽는 일은 어느새 내게 은밀한 취미 같은 일이 되었고 내 나름의 태도 같은 것도 생겼다. 여러 서평가들마다 자기 나름의 스타일이 있다. 장정일 씨의 서평을 읽을 때의 마음가짐이 다르고 이현우 씨의 서평을 읽을 때의 마음가짐이 다르다. 김이경 씨도 그렇다. 그리고 여기에 금정연 이라는 이름이 추가되어야 한다. 금정연 씨의 서평은 위의 세 사람과 확연히 다르다. 그는 주로 문학을 읽고, 문학 이론 혹은 비평서를 읽는다. 그의 서평은 대개 유쾌하고, 어렵지 않고, 내용을 요약하고 관련된 책과의 관계망 속에서 이 책이 위치한 지점을 살피는 일 같은 서평의 전통적인 역할에 때로 충실하지 않지만 무엇보다 재밌다. 하지만 그러면서 동시에 이 서평들에 무언가 일관된 스타일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에필로그에 가서 그 단서를 찾았다. 


무엇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서평은 그가 평하고 있는 책을 꼭 닮은, 닮으려고 노력하는 서평이다. 따분한 플롯의 책에 대해서는 따분한 서평을, 복잡한 미로 같은 구조의 책이라면 마찬가지의 서평을, 문학이라는 개념에 대한 홀로코스트를 자행하고 있는 책이라면 폭력적인 서평을,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책이라면 그 한계를 똑같이 공유하는 서평 말이다. 나는 그것이 독서라는 경험을 단순한 ‘목격담’으로 축소시키지 않기 위해 서평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윤리라고 생각한다. 381쪽


구구절절 길게 적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새로운 서평가가 등장하는 일 같은 것을 우리 사회가 반길 것 같지는 않지만, 그 책을 꼬박꼬박 사 볼 독자가 여기 한 사람은 있다. 건필하시길!



모리스 나도: 모리스 블랑쇼가 비평가란 비독자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잡지나 신문의 편집장은 이런 면에서 제곱의 비독자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독서'하지 않으면서 '독서'합니다. 실제로 진정한 독서란 전자의 독서를 말하죠. 그런데 이 전자의 독서, 현재 내가 종사하고 있는 직업 속에서는 나는 그걸 할 수 없습니다. 요컨대 나는 독서할 의무가 없는 순간에만 진정한 독자가 됩니다. 『문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58~59쪽, 이 책 37쪽에서 재인용.


그럴 때면 나는 누군가의 일기를 읽는다. 아무 간도 없는 흰 죽을 먹듯, 아무런 꾸밈도 없는 소박한 단어들의 (짧은) 나열을. 별다른 내용이 아니라도 좋다. ‘이렇게 살아라’라는 훈수도, ‘이런 삶은 어때?’라는 유혹도, ‘나는 이런 삶을 살아!’라는 과시도 아닌 다만 담담한 삶의 기록이면 족하다. 제 집을 이고 다니는 달팽이처럼,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만이 내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풍경이다. 76쪽


그리고 챈들러, 챈들러, 챈들러, 챈들러다. 시중에 나와 있는 그의 모든 책을 읽어라. 역시 덜 자란 구제불능의 애송이라고 욕해도 좋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것뿐이다. 만약 이 글을 통해 챈들러를 다 읽은 사람이 있다면, 연락하시라. 김릿 한 잔 사겠다. 딱 한 잔이다. 158쪽




서서비행

저자
금정연 지음
출판사
마티 | 2012-08-17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서평을 써서 생계를 유지하는 자가 서평가인가?”글을 읽는, 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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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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