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년 동안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어떤 종류의 사람을 싫어하는지'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애를 먹는 경우가 잦았다. 평소에는 이런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꺼내는 일이 없는데, 그러고 싶었던 때는 대개 소개팅을 앞두고 나의 바람을 설명하거나 소개팅이 끝나고 나의 마음을 해명하고 싶을 때였다. '나는 이런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아.'였던 셈이다. 


애를 먹으면서도 스스로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나는 정신 세계가 지나치게 공적인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아.'였다. 여기서 '공적'이란 공공적, 영어로 표현하는 것이 좀 더 와닿는데 '퍼블릭한'이었다. 만나는 사람, 하는 생각, 읽는 글 등 삶이나 머릿속의 대부분이 자기가 아니라 타인의 문제로 차 있는 사람들. 그들이 대체로 사적 삶을 꾸리는 일을 폄하하거나 거기에 태만하거나 그것을 외면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굳이 가져다 붙이자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그들이 오래전의 나를 생각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 1년여 동안 춤을 추면서 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내가 생각의 방향을 잘못 잡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깨달음의 실마리는 생뚱맞게도 휴 드레이퍼스의 <모든 것은 빛난다>였다. 내용을 곁들여 설명하기에는 책을 읽은 지 오래되어서 생략하기로 하고, 핵심만 말하자면, 나는 '나'가 아니라 '우리'를 믿는 사람, '우리' 속에서 편안해하는 사람을 폄하한다는 점이다. 대의나 명분 같은 것을 좇으면서 누군가가 자신과 평생 함께할 거라 믿는 마음이나, '우리'를 믿으면서 안심하는 얼굴을 보면 안쓰럽고 옛 기억이 떠올라 괴롭다. 술을 잘 먹지도 않지만 맥주 두어 잔을 먹고 취기가 올라오면 얼른 얼굴색을 원 상태로 돌리고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쓰는 것도, 왁자지껄한 곳에서 괜히 마음이 편하지가 못해서 혼자 음료수를 마시곤 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던 것 같다. '우리' 속에서 마음껏 취하고 정신을 놓는 것에, 정조(mood)에 휩싸이는 것에 거부 반응이 있다. 


공적인 데 한 치의 관심이 없는 사람들 중에도 '우리'를 믿거나 '우리' 속에서 편안해하는 사람들은 많다. 동호회든 무엇이든, 자기가 속한 어떤 집단에 지나치게 애정을 쏟는 사람들, 집단의 규칙이나 의리 같은 것에 얽매이는 사람들, 집단 속에서 안심하는 사람들. 기본적으로 나는 무리(우리와 무리는 자음 하나가 다를 뿐이구나.)의 관심을 갈구하면서도 이내 무리 생활이 불편해 홀로 떨어져 나오는 동물이었다. 밖에서 무리의 모습을 부러워하되 그곳에 속하면 이내 다시 또 떨어져 나오는 식. 그렇게 내내 살아 왔던 것 같다. 철든 이후로 언제나 '동료'들이 생기기를 바랐지만 계속해서 실패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여러 명이 모인 집단으로서 친구가 되어 몇 년째 만나는 친구들이라고는 딱 하나뿐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들 대부분이 비슷한 경험과 정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금 깨닫는다.


결국 나는 내가 되지 못한 인간형을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마디로 말하면, 자존감이 강한 사람. 거기에 더해, 개인과 집단을 구분할 줄 아는 지혜를 가진 사람. 개인을 경멸하지 않되 집단에 얽매이는 행태를 경멸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자유로운' 사람인 걸까?


시쳇말로 하면, 그냥 다 '아이고 부질없다'.



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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